<저자와함께>"과학자가 본 불교의 세계"생화학자윤주억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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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세기말 지구촌의 시선이 동양으로 몰리고 있다.
20세기를 떠받쳐온 서구 과학의 한계가 속속 드러나면서 인류의 미래를 밝혀줄 길잡이로 동양의 전통사상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반평생을 실험실에서 보낸 생화학자 윤주억(尹柱億.64.
동국대교수)씨가 정년을 한해 앞두고 펴낸 『과학자가 본 불교의세계』(밀알刊)가 바로 이같은 시대적 조류를 반영하는 책이다.
尹교수는 스스로를 불교의 문외한이라고 말한다.과학실험과 연구가 본업이기 때문이다.그러나 30여년간 틈틈이 해온 불교 공부를 정리한 이 책의 메시지는 제법 심각하다.
尹교수는 더이상 화해가 불가능할 정도로 사이가 벌어진 과학과종교의 조화로운 만남을 조심스레 모색한다.논의의 핵심은 불교와과학의 공통분모.이를 바탕으로 환경오염.인종분규 등 각종 상처에 시달리는 지구촌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바로잡 으려고 한다.그렇다고 불교의 특정교리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단지 이 시대의위기를 헤쳐나갈 방안으로 불교의 원리를 원용한다.
『불교철학은 자연철학 위에 치밀한 논리로 쌓아올려져 있습니다.과학시대의 종교라고 할까요.』 尹교수는 특히 대승불교의 인식론에 해당하는 유식(唯識)사상과 현대과학의 접점에 주목한다.일례로 탁자 위의 책 하나를 보았다고 치자.
현대의 신경생리학은 신경세포를 거쳐 두뇌에 전달된 이미지와 두뇌에 미리 기억된 이미지가 일치할 때 시각작용이 완성된다고 정의한다.머리속에 기억된 이미지가 없으면 책을 알아볼 수 없다고.이를 불교에선 기억을 구성하는 조직인 종자(種 子)와 저장된 상(像)을 대조하는 아라야식(阿賴耶識)이 조응한다고 설명한다. 또 현대물리학의 빅뱅이론이 규명한 물질의 최소단위인 「쿼크」와 불교의 「극미(極微)」도 거의 정확하게 일치,생성소멸하는 우주의 법칙은 바로 불교의 「무상」과 통한다고 말한다.
이밖에도 정보화사회의 총아인 컴퓨터의 논리회로와 불교 인식론의 유사성을 비교한다.
그렇다면 불교가 과학시대에 던지는 의미는 무엇일까.尹교수는 「타리즉자리」(他利卽自利)라는 한마디로 응답한다.남의 이익이 곧 자기의 이익이라는 뜻.
『불교는 만물의 평등사상에 기초합니다.사람은 물론 동식물,심지어 세균도 모두 동일한 생명체라는 생각이죠.현미경을 보다가 문득 깨달았어요.세포만을 볼 때 인간과 미생물 사이에 어떤 우열관계도 없다는 사실을요.』 여기에서 그는 현대과학의 맹점을 파고든다.
자연에 대한 인간우위,즉 인본주의를 신봉하는 풍토에서 환경파괴.자원고갈.국제분쟁 등의 병폐가 발생한다는 생각이다.
또 일상에서도 세제남용.새치기 등 나만 좋으면 그만이라고 한일이 결국 자신에게 피해로 돌아오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것.
尹교수는 『지금까지 종교와 과학은 인간의 물질적 욕망에 봉사하는 쪽으로만 이용됐다』며 『철저한 평등에 기초한 자아회복이 가장 큰 과제』라고 말을 맺었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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