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속보이는 고이즈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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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현기 도쿄 특파원

일본 후쿠오카(福岡)지법이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총리의 야스쿠니(靖國) 신사 참배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린 직후인 7일 낮.

"참배는 공적이냐, 사적이냐."

"나는 총리이자 개인 고이즈미의 마음을 담아 참배한 것이다. 공(公)과 사(私) 어느 쪽인지 모른다."

같은 날 밤 총리 관저.

"입장에 변화가 없나."

"개인적 심정에 근거해 참배한 것이므로 사적 참배로 봐도 좋다."

"낮까지만 해도 공과 사를 나눌 필요가 없다고 하지 않았나."

"답할 필요가 없다. 개인적 감정이란 뜻이다."

"도대체 왜 참배에 집착하는가."

"극히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고이즈미는 3년여 전 총리 취임 이후 줄곧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해선 공과 사를 흐려왔다. 7일 낮까지만 해도 그랬다. 그러나 이날 위헌 판결의 여파가 급속도로 번지자 갑자기 '사적 참배'로 돌아섰다.

고이즈미는 자신이 세운 뜻을 굽혔다는 말을 가장 듣기 싫어한다고 한다. 사적 참배로의 입장 선회도 앞으로 참배를 계속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게 일본 언론들의 분석이다.

그러나 방명록에 '내각총리대신 고이즈미'라고 쓰고 한 참배를 개인 자격으로 볼 이가 과연 얼마나 있을까. 또 일국의 총리가 공개적으로 한 행위를 "이건 공인, 저건 개인"이라고 누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그는 사법부를 겨냥해 "도대체 왜 위헌인지 모르겠다"는 말을 이날 하루에만 16번이나 쏟아냈다. 또 "매년 이세(伊勢)신궁에 가는데 그럼 그것도 위헌이란 말이냐"며 불만을 터뜨렸다.

하지만 일부 극우성향의 신문을 제외한 일본의 대다수 언론은 "군국주의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고 A급 전범이 합사(合祀)돼 있는 등 그 역사를 놓고 본다면 어떻게 (야스쿠니 신사와) 이세신궁을 동렬에 놓고 볼 수 있겠느냐"(아사히)며 반박하고 있다.

고이즈미는 3년 전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한 일련의 소송에 대해 "세상엔 참 이상한 사람들이 다 있다"고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이젠 '소신'에 집착하다 한국.중국과의 외교를 망치고 사법부에서도 철퇴를 맞은 그를 '이상한 사람'으로 보는 일본인도 적지 않다.

김현기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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