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노트북을 열며

마이너리티 대통령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6면

지난 대선에서 전국 248개 시·군·구 중 이 대통령의 득표율이 5년 전 한나라당 후보 때보다 낮은 게 101곳이나 된다. 17대 대선은 10년 만의 정권교체 꿈에 보수의 결집이 유난했었다. 그런데도 5년 전보다 득표율이 낮아진 곳이 100곳을 넘었다.

또 다른 통계. 노무현 정부 후반부인 2006년 초 한 여론조사 기관은 국민들의 이념성향을 조사해 보수 39.1%, 진보 28.6%, 중도 32.3%라는 결과를 내놓았다. 2007년 대선에서 정동영 후보가 얻은 표는 26.1%로 민노당 권영길 후보가 얻은 표까지 합하면 이 여론조사에서 진보라고 답한 28.6%와 거의 일치한다. 반면 보수와 중도를 합친 71.3% 중 48.7%가 이명박으로, 15.1%가 이회창으로 갈라졌다. 이 대통령의 득표율 속엔 보수성향 유권자만큼의 중도성향 유권자가 포함돼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거꾸로 이 대통령이 보수성향 유권자들의 전폭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얘기다.

대선 당시 이 대통령의 선거참모들도 이를 간파했다. 한 참모가 쓴 『대통령을 만든 마케팅 비밀 일곱 가지』란 책에는 ‘집안은 물론 산에까지 냄새가 퍼지도록 맛있는 먹이를 만들면 집토끼는 문이 열려 있어도 꼼짝하지 않을 것이고 산토끼가 집 주위에 모여들 것’이라는 대목이 있다. 집토끼인 보수 표와 산토끼인 중도 표를 이종교배했다는 설명도 있다. 결국 한나라당 후보란 브랜드로 보수의 기본을 확보했고, 실용이라는 새 브랜드로 중도성향의 소비자까지 매료시킨 결과가 48.7%였다.이 대통령의 탈이념성은 5월 20일 손학규 대표와의 청와대 회동 때 “나는 보수가 아니다”라는 커밍아웃 발언까지 낳았다.

한국 정치에서 정치 시장의 이념성은 정국이 평온할 땐 잘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대형 이슈가 사회 전체를 흔들 때 수면 밑에 움츠리고 있던 이념 대결은 선명해진다. 그 결과 쇠고기 정국 두 달을 헤매는 동안 ‘마이너리티 정치인 이명박’의 본모습은 발가벗겨졌다. 진보로부턴 ‘정권 타도’ 대상으로 전락했고, 보수로부턴 ‘무능한 정부’로 비판받고 있다. 실용에 매료됐던 중도로부터도 경제 실력을 의심받고 있다. 대통령의 사람들은 이제 지지율 하락이 바닥을 쳤다고 말한다. 하지만 김대중의 호남, 노무현의 진보 같은 절대적 팬클럽을 갖고 있지 못한 이 대통령의 바닥은 더 깊을 수도 있다.

그래서 2007년 12월로 되돌아가기 위한 길은 험하고 고통스럽다. 조급한 대통령의 사람들 중에선 “할 수 없다. 집토끼만이라도 제대로 잡자”는 말을 하기 시작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건 필요조건은 될지언정 충분조건은 되지 못한다. 되돌아가는 길은 지난 6개월 동안 주렁주렁 치장한 장식을 벗어던지고 다시 빈 몸이 돼야 한다. 마이너리티를 인정하고 흩어진 48.7%를 끌어 모아야 한다.

권력의 나눔에서 시작해야 한다. 대선 직후 대통령의 사람들에게 “이명박 대통령이 가장 자신없어 하는 부분이 뭐냐”고 물어본 일이 있다. 공통된 얘기는 “정치와 외교를 잘 모른다”였다. 그렇다면 자신없는 정치를, 잘 모르는 외교를 손에 꽉 쥐고 있을 필요가 없다. “정치는 당신이 대통령이야” “외교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고 과감하게 권한을 주면 된다. 권력은 쥐고 있다고 커지는 게 아니다. 놓아주는 권력이 더 무서울 수 있다. 권한을 주되 대통령은 실적으로 평가하면 된다. 그게 CEO 리더십이다. 그 대신 할 일이 있다. 누구도 대신 못하고, 자신이 제일 잘할 수 있는 전공에 헌신하는 일이다. 정치를 잘 알고, 외교를 잘해서 ‘이명박 대통령’으로 뽑힌 게 아니질 않은가. 추가로 관료들의 숨통도 이젠 터주자. 지금 관가에선 ‘관란(官亂)’이란 얘기가 나돌 정도로 공무원의 사기가 죽어 있다.

박승희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