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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계한 미테랑 前 프랑스대통령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프랑수아 미테랑 전대통령은 샤를 드골 대통령 이후 프랑스 정치사에 가장 큰 족적을 남긴 인물로 기록된다.
사회주의자로서는 최초로 대권을 잡아 우파를 대체할 수 있는 수권세력으로 좌파를 국민에게 각인시키는 한편 14년동안 제5공화국 사상 최장수 대통령을 재임했다.
국제정치 무대에서도 드골이 개척한 독자외교 영역을 고수하면서도 유럽통합을 적극적으로 추진,오늘날 유럽연합(EU)을 탄생시키는 산파역을 해냈다.그는 드골과 지스카르 데스탱 두 전직 대통령과 맞서 두 차례의 고배를 마신뒤 81년5월 사상 최초의 좌파 대통령으로 당선,여세를 몰아 총선에서 좌파 정부를 탄생시켰다. 16년 코냑의 명산지인 자르낙에서 태어난 그는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입대,곧바로 나치의 포로가 됐으나 세번의 탈출시도 끝에 성공한다.이어 레지스탕스에 가담한뒤 종전을 맞은 미테랑은 언론과 정치사이에서 고민하다 정치를 선택,46년 최초 하원의원에 당선됐다.
57년 드골이 신헌법을 만들며 재등장하기까지 최연소 장관등 11번이나 장관직을 맡는등 화려한 정치경력을 쌓았다.
65년 처음 나선 대선에서 드골에게 패배한 그는 72년 사회당을 창당하고 공산당과 연합전선을 펴며 74년 데스탱과 두번째대선에서 겨뤘으나 또다시 패배한다.
한동안 침체기를 맞던 미테랑은 결국 81년 세번째의 도전끝에보수 우파에 염증을 느낀 프랑스 국민들의 선택으로 엘리제궁에 들어선다.
그는 재임기간중 사형제도 폐지,주간 근로시간 단축,정부 권력의 지방분권화를 통해 사회주의의 장점을 성공적으로 정책에 연결했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86년 총선에서 좌파가 패배함에 따라 우파 총리와 함께 통치하는 사상 초유 동거정부를 구성하면서도 특유의 정치력으로 88년 자크 시라크 후보를 상대로 승리,재선에 성공하고 좌파정부를 재구성했다.
그는 특히 시장경제를 가미한 사회주의를 추구하며 유럽 단일시장등 오늘날 유럽통합의 주춧돌을 세웠다.그러나 미테랑은 집권 말기로 가면서 재정적자,인플레,프랑화의 가치하락등 경제문제에서실정을 거듭하고 기록적인 실업률을 기록,93년 제2차 동거정부를 겪어야 했다.
집권 말기로 접어들면서 권위주의적인 면이 강해져 「군주」라는비난을 사기도 했다.바스티유 국립오페라극장 건설,루브르 박물관개보수등 대규모 건설사업이 문화적으로 평가받고 있으나 군주적 발상이라는 비판도 없지않다.미테랑 전대통령은 개인적으로 한때 2차대전 당시 비시정부에 협조했다는 주장때문에 곤욕을 치렀으며말년에는 내연의 처 사이에서 낳은 숨겨놓은 딸을 공개해 화제를낳기도 했다.
3년전 전립선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미테랑은 노령에도불구하고 두차례의 대수술을 받으면서도 지난해 5월 대통령직을 이양할 때까지 불굴의 의지로 직무를 수행해 프랑스인들에게 국민의 아버지라는 상을 심어줬다.
파리=고대훈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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