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의 역사] 36. 신천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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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 원주 육민관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1953년 서울로 올라온 필자.

원주의 육민관(育民館)중.고교. 서울대 예과 때 내려와 젊음을 한껏 불태웠던 시골학교다. 반년 정도 있어보니 부산에서 더럽혀진 마음도 몸도 제법 맑아진 것 같다. 충주에서 윤남한(尹南漢)을 데려온 것은 잘한 짓이었다. 유호(柳浩) 선생이 이준해(李俊海) 선생을 끌어들인 것도 잘한 일이었다. 의대를 다녔다는 오영석(吳英錫) 선생은 부인 김소정(金素貞) 선생과 같이 봉사했다. 전홍길(全洪吉).김응남(金應南).조광식(趙光植).김인식(金寅植).이명선(李明善).양종하(梁宗河).박형국(朴亨國) 선생과 김일성대에서 왔다는 현용구(玄龍龜) 선생 등은 모두 없어서는 안 될 사람들이었다. 교사를 새로 지어 옮기자는 나의 제의를 이창수(李昌壽) 선생을 비롯, 모두 이해해 주었다. 위원회를 만들어 행동에 옮겼다. 홍범희 내무차관 소개로 체신부에 가서 100만환을 융자받은 것이 출발 신호가 됐다. 그리고 험난한 교사 신축사업이 진행 중일 때 돈 구하러 서울에 간 나는 화신 근처에서 천관우(千寬宇)형을 만나 한국일보에 입사하게 됐다.

정전협정으로 지긋지긋한 한국전쟁의 포성은 멎었다. 서울로 돌아온 피란민들은 폐허를 보고 망연자실했으나 이를 악물고 재건에 나섰다. 희한한 것은 한국인의 기질이다. 당할 때는 실컷 당해도 엉덩이를 털고 일어날 땐 의지의 눈동자가 비상하게 반짝인다. 한다면 하는 것이다.

조선일보 사장을 하던 장기영(張基榮)씨는 한국일보를 창간해 민족의 끈기를 맘껏 펼쳐보겠다고 했다.

나는 문화부에 배치됐다. 장영창(張泳暢).김규동(金奎東)씨가 있었다. 여기자로 박현서(朴賢緖)씨가 있었다. 오종식(吳宗植)씨가 주필, 천관우.조풍연(趙豊衍)씨가 논설위원이었다. 동아일보.조선일보 등에서 일류 기자들을 빼온 것이 장기영 사장의 첫 전략이었다. 서울 수복 이후 온 힘을 재건에 쏟는 모든 시민의 무서운 의지와 張사장의 의지가 맞아떨어졌다. 1954년 6월 9일 한국일보가 창간됐다.

나는 그때 우리나라의 문화 수준을 전반적으로 상당히 낮게 평가하고 있었다. 심하게 말하면 촌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타임.뉴스위크.라이프 등에서 눈길을 끄는 기사들을 번역해 소개했다. 반응이 매우 좋았다. 그런 뉴스에 굶주려 있을 때였으니까.

오종식 선생이 걸물이었다. 일본 도요(東洋)대 출신이라는 그는 문학.철학.한학 분야에서 박식하기 이를 데 없다. 저녁마다 인사동에 있는 중국집 '동해루'나 적선동의 '대머리집'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는 시국이나 철학을 화제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그것이 그렇게 영양분이 됐다.

신춘문예 공모를 했을 때다. 심사위원으로 문학의 백철(白鐵) 선생, 연극의 유치진(柳致眞) 선생, 시의 김광섭(金珖燮)선생 등을 모셨는데, 결과가 재미있었다. 소설 부문에 서울대 문리대 불문과 후배인 오상원(吳尙源)의 '유예(猶豫)'가 당선됐다. 고려대 출신 정한숙(鄭漢淑)이 가작을 받았다. 손이 약간 안으로 굽었던가.

한운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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