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광주로간군인들>5.전남도청 진압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2면

5.18 기간중 계엄군측은 5월27일 전남도청 공격을 앞두고도청폭파 및 포대 공격까지 계획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또 진압군에 『투항의사와 상관없이 시위대를 보이는 대로 사살하라』는 명령이 하달됐고,이같은 명령에 따라 비무장 시위대도 다수 희생돼 현재까지 밝혀진 사망자 17명보다 훨씬 많은 100여명이 사망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도청진압에 나섰던 3공수 11대대 소속 李모(40.당시 중사),洪모(39.중사),11공수 61대대 權모(40.중사),20사단 포대 朴모(38.상병),60연대 鄭모(37),상무대 헌병대 張모(67.준위)씨 등의 증언을 들어본다.
『수통에 소주를 채우고 방탄조끼를 입었습니다.실탄은 잔뜩 쌓여있어 마음껏 가져갈 수 있었습니다(보통 1인당 300~400발을 소지했다).전날 시위대와 교전중 부상한 동료의 피를 머리에 떠올리며「돌격명령」만 떨어지기를 기다렸습니다.
내가 죽지않기 위해서는 시민에게 총을 쏘아야 하는 전쟁과 같은 분위기였습니다.투입전 지역대장으로부터「보이는 대로 무조건 사살하라」는 지시도 있었고요.』〈李씨〉 『오전 4시쯤 저격수들이 곳곳에 배치됐습니다.장갑차를 앞세우고 돌진,M16 소총을 연발위치에 놓고 움직이는 것은 뭐든지 긁어댔습니다.시위대는 잠들어 있었는지 별다른 저항이 없었고 단지 총소리에 놀란 시민군들이 창문위로 머리를 들면 수박깨지듯 저격수의 총탄에 쓰러졌습니다.』〈洪씨〉 3공수가 주축이 된 진압군은 불과 30여분만에작전을 완료했다.카빈소총을 든 시위대뿐만 아니라 무기가 없는 사람들에게도 무차별로 사격했다는 게 이들의 공통된 얘기다.
『3단계 진압작전이 세워졌습니다.일반 공수부대원들을 투입하는것이 1단계였습니다.이것이 실패하면 2단계로 도청폭파가 계획됐습니다.이마저 여의치 않으면 포대공격을 고려하고 있다는 말을 대대장으로부터 들었습니다.그래서 공수부대원들이 투입작전을 시작할 때 폭발조(3공수부대 소속)가 밖에서 대기중이었습니다.하지만 1단계에서 너무 쉽게 끝나 2,3단계는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습니다.』〈李씨〉 『22일 광주공항에 도착했습니다.포대인 우리는 전방도 아니고 광주로 왜 이동하는지 아무도 몰랐습니다.도청진압 직전 26일 도청부근에 155㎜포와 함께 배치됐습니다.
아마 최악의 경우 도청을 포격할 의도였을 겁니다.우리때문인지「광주 불바다설」등 유언비어가 파다했습니다.』〈朴씨〉 검찰 보고서에 따르면 도청진압 과정에서 17명이 사망했고 297명이 체포됐다.그러나 진압군과 시위대는 이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사망자가 17명이라는 것은 말도 안돼요.어림잡아 100명 이상이 사살됐습니다.내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습니다.』〈權씨〉 당시 도청을 사수하던 시위대 양인화(梁引花.39.당시 식당종업원)씨는『26일 점호를 하며 400여명이 저녁밥을 같이 먹었습니다.이후 10여명 정도가 도청 지하실과 동구청을 연결하는 하수구로 빠져 나갔습니다.그러나 나중에 산 사람은 250여명뿐이었습니다』고 말했다.
『죽은 사람의 신원확인을 위해 법무참모와 함께 지문감식을 했습니다.본 것만 해도 최소 50여명이었습니다.신발과 옷이 모두깨끗해 아마도 새 옷으로 갈아 입고 죽음을 준비한 것같더군요.
』〈張씨〉 『단지 시키는대로 쏘기만 했습니다.도청진압 작전이 끝난뒤 월남전에 참전했던 선배가 한마디 하더군요.「월남보다 더무섭고 잔인한 전쟁이었다」고….』〈權씨〉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