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년을 풍미한 말말말-비자금 정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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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한 시대의 말은 그 시절의 정서와 시대상을 함축해준다.올 한해만큼 수많은 말이 쏟아져 비감한 시대상황을 표출했던 적도 드물었다.삼풍백화점 붕괴등 잇따른 참사와 비자금,5.18정국등 역사의 앙금으로 남아 있던 구조적 모순이 한꺼번에 분출했던 95년은 말의 홍수(洪水)로 정신차릴 수 없던 한해였다.지난 한해의 말들은 치밀어오르는 분노와 탄식.갈등, 자괴의 정서를 표현한 것이 대부분이었다.이 말들은 그러나 우리의 현주소를 깊이반성케 해주는 소중한 타산지석(他山 之石)으로 두고두고 되새겨야 할 말이기도 했다.올해 쏟아진 말들을 부문별로 나누어 되돌아 본다.
노태우(盧泰愚).전두환(全斗煥) 두 전직대통령을 주연으로 한비자금,5.18정국에 쏟아진 말은 올해의 하이라이트.
비자금계좌가 폭로되자 盧씨측은 『우리도 그 돈주인이 누군지 알고 싶다.철저히 조사해달라』고 응수했다 추후 국민의 분노를 샀다.초반 盧씨 비자금 총액이 4,000억원대로 밝혀지자 박지원(朴智元)국민회의대변인은『단군이 지금까지 살 면서 매년 1억원을 저축해야 하는 돈』이라고 그 규모를 풀이했다.
『이 돈은 통치자금으로 쓰고 남은 돈』(李賢雨전청와대경호실장)이라는 盧씨측 변명에 검찰은 『통치자금이란 말이 너무 생소해국어사전을 뒤졌지만 나오지 않더라』(安剛民 대검중수부장)고 응수,우리 정치의 오랜 부조리를 함축했다.盧씨는 대국민사과에서 『국민이 내리는 어떠한 심판도,어떤 돌팔매질도 기꺼이 감수하겠다』고 했으나 뇌물조성.대선자금 지원등 사용처엔 함구로 일관.
반면 그는 구속 수감되며 『정치인 여러분들의 가슴에 담고 있는불신과 갈등을 모두 내가 안고 가 겠다』고 해 세인을 어리둥절하게 했다.대학가 주점에선 이를 빗대어 『여러분의 불신과 갈등모두 안고 갈테니 술값은 부탁한다』는 유머가 등장했다.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이 『盧대통령으로부터 직접 한푼도 받은 일이 없다』고 선언하자 김상현(金相賢)국민회의 지도위의장은 『결혼식에서 신랑이 직접 축의금을 받느냐』며 반박했다.구창림(具昌林)자민련대변인은 여권의 대선자금 공개를 촉구하 며 『성공한쿠데타를 처벌한다면 성공한 대선도 심판받아야 한다』고 꼬집었다. 비자금 제공기업 수사가 이어지자 업계에서는 『요즘 서초동 11층(대검 중수부)에 못 불려가면 팔불출』이라는 말이 등장.
한 기업총수는 『지금은 대검 중수부가 무섭지만 6공때는 청와대가 훨씬 무서웠다』고 토로했다.
노래방에선 인기 듀엣 「육각수」의 노래(흥보가 기가 막혀)를바꾼 『태우가 기가 막혀』가 유행해 서민들의 허탈함을 반영.샐러리맨들 사이에는 『노처녀는 시집 안간다.노점상은 밑진다.노인은 빨리 죽고 싶다.노태우는 보통사람』이라는 신 (新)4대 거짓말이 회자됐다.
김대중(金大中) 국민회의총재가 20억원 수수 고백으로 곤경에처하자 측근 한화갑(韓和甲)의원은 『김구(金九)선생이 독립운동할 때 국내에서 모금한 자금중에는 친일파 돈도 있었다』고 거들었다 곤욕을 치렀다.金총재는 「20억원+α」가 계속 고개를 들자 『신부님께 더이상 받은 일이 없다는 사실을 고해성사했다』며불끄기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金대통령이 『이 나라에 정의와 진실,그리고 법이 살아있다는 걸 보여주겠다』며 특별법제정을 선포해 시작된 5.18정국도 무수한 말을 낳았다.
全전대통령은 골목 성명을 통해 『내가 내란수괴라면 3당 야합한 金대통령도 응분의 책임을 지는 게 순리』라고 도전했다 전격구속되고 말았다.全씨는 『5공 정통성이 부정되면 살아 뭘 하겠느냐』『아웅산때 죽은 목숨이 밥을 먹겠느냐』며 단식을 계속하다결국 병원으로 실려가고 말았다.
일부 재야단체 회원들은 『단식투쟁 전문가인 우리들이 全씨가 단식을 그만둘 때까지 단식을 하겠다』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다. 현정권내에서는 두 전직대통령 구속에도 뚜렷한 국면전환 성과가 드러나지 않자 『박수는 받는데 표는 없고 병은 고쳤는데 사람은 죽는 격』이라며 갑갑한 심정을 표출.
정치권내의 DJ(金大中)복귀와 신당창당,후계구도.단체장선거.
선거비리사정등도 올 한해 정파간의 끝간데 없는 말싸움을 촉발했다. 은퇴한 DJ의 복귀선언에 민자당대변인은 『이제 金이사장은자기이름이 김대중이라는 것을 빼고는 아무 말도 믿을 수 없다』며 포화를 퍼부었다.
국민회의측은 『민주당은 민자당의 2중대며 합당 예행연습중』이라고 「2중대론」을 들고 나왔고,민주당은 『우리는 역사의 본부중대』(張基旭의원)『새정치국민회의는 헌정치 반상회의,아태재단은공천헌금의 아도(阿賭.싹쓸이)재단』(金龍洙부대변 인)이라며 비슷한 수준의 말싸움을 벌였다.
최초의 민선단체장선거인 6.27지방선거도 말의 범람을 가져왔다.김대중이사장의 낙점으로 전남도지사후보 경선에 나섰던 김성훈(金成勳)교수는 낙선후 『지난 열흘간 나는 세상에서 가장 저질인간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며 정치판의 흑색선전에 환멸감을 토로했다. 서울시장에 당선된 조순(趙淳)시장이 『나는 김대중이사장대리인이 아닌 서울시민의 대리인으로서의 독립성을 절대 잊지 않겠다』며 거리를 두자 국민회의측은 『왜 보은(報恩)의 몸짓을 보이지 않느냐』고 불만을 토로.
단체장선거후 신당창당 언저리의 사정정국에서 최낙도(崔洛道).
박은태(朴恩台)의원이 구속되자 『여당은 돼지를 잡아먹었는데 족발 하나 먹은 우리만 잡아넣는다』(朴智元대변인)는 반발이 터져나왔다. 민주당은 즉각 『돼지나 족발이나 둘다 돼지고기,족발 하나가 아니라 발톱하나도 먹어서는 안된다』고 응수했다.
대통령임기 2년반을 남겨놓고 불거져 나온 후계자 논쟁도 말의성찬을 이뤘다.金대통령은 9월 중앙일보창간 30주년회견에서 『지금 시점에서 후계구도를 발언하는 사람은 앞으로 후계구도가 부상될 때 결코 도움이 되지않을 것』이라고 쐐기를 박았다.
그는 그러나 10월9일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국민들이 깜짝 놀랄 정도의 젊은 후보를 내세워 승리할 것』이라는 의미있는 발언으로 구구한 해석을 낳았다.
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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