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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많이 편찮으신가요?』 놀라 물었으나 남편은 별로 염려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약간 열이 있으신 것같았소.』 아버지는 사위를 공항에 내보내기 위해 감기라고 둘러댄 것은 아닐까.딸의 이상징후를 느끼고있는지도 모른다.
남편이 모는 차 안의 시계에 맞춰 시침(時針)을 앞당겼다.우변호사와 더불어 얻은 「여덟시간」이 남편과 더불어 자취를 거두고 있었다.
『별일 없었지요?』 『응.』 짤막한 물음에 보다 짤막한 대답이 돌아왔다.
사랑이 없는 부부의 회화(會話)는 이렇게 토막나기 일쑤다.한사오십년 함께 살아온 노부부의 대화도 이와 흡사하다.그러나 차라리 침묵 속에 진행되는 노부부의 얘기 나눔은 언제나 하나의 따스한 끈으로 이어져 있다.
집 마당엔 자귀꽃이 만발하고 있었다.뜨락에 심으면 부부간의 우의가 두터워진다는 꽃나무.밤눈에도 화려하게 돋보이는 그 연지솔꽃이 슬펐다.
『저녁 식사 해야지?』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남편은 부엌불을 밝히며 말했다.
『비행기 안에서 하고 왔어요.』 『나는 먹어야겠는데….』 냉장고를 뒤지고 있다.시장한 모양이다.
『볶음밥이라도 괜찮아요?』 식은밥이 남아 있는 것을 보고 아리영은 쇠고기와 채소를 챙겼다.
미처 짐도 풀기 전에 남편의 저녁 식사를 차려야 했다.그러나포옹이나 키스를 당하느니 그것이 오히려 다행스러웠다.
그나저나 이 밤 넘길 일이 아득하다.
남편이 육신을 요구해오면 어떻게 피할 것인가.「몸」하는 중이라 핑계 댈까,아니면 피곤하다고 엄살 부릴까.
-아니다.오늘 단둘이 있는 이 기회에 결판을 내자.
아리영은 앞치마를 천천히 벗고 식사를 끝낸 남편 앞에 앉았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정색해서 하는 말투에 신문을 뒤적이며 차마시던 남편이 얼굴을 들었다.의아해하는 눈빛이다.
『이혼해주셔요.』 남편은 한동안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되물었다. 『이혼? 왜 이제 와서….』 뭔가를 말하려다 그는 입을 다물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을까.마루의 괘종시계가 자정(子正)을알렸다.열두번의 종소리가 영겁(永劫)으로 이어지듯 하염없이 울렸다가 멎었다.
『당신이 원하는대로 해요.』 시계 소리가 멎자 남편이 입을 떼었다.아리영의 인생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단 부탁이 있어.이혼수속은 당신이 해요.』 이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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