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시평

‘바보 과학자’가 세상을 바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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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사회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사람들의 생각이나 행동도 성급해지는 듯하다. 많은 사람은 정식 음식보다 패스트푸드를 선호하고, 뉴스도 인쇄매체보다 감각적 자극을 주는 TV나 인터넷 동영상에 의존하고 있다.

이 같은 인스턴트 문화, 감성 위주 행동패턴의 확산은 세계적인 현상이지만, 우리나라는 특유의 ‘빨리빨리’ 국민성과 어울려 그 정도가 지나치지 않나 우려된다. 이에 대해 이명현 서울대 철학과 명예교수는 “대부분의 사람이 당장 자기 눈앞에 있는 것에만 관심을 갖고 그것을 획득하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더 깊고 넓게, 그리고 멀리 내다보는 사람들을 엉뚱한 바보라고 취급한다”고 한탄하고 있다.(미래상상연구소 세미나 ‘바보가 세상을 구원한다’ 기조발제문)

더 큰 문제는 공동체의 미래를 걱정하고 이끌어 나가야 할 지식인 사회에까지 이러한 가벼움과 ‘약삭빠름’이 퍼지고 있다는 점이다. 대학 교수들은 두툼하고 깊이 있는 논문을 쓰기보다 언론에 짧은 시론을 싣기를 선호하고, 연구 주제를 선택할 때에도 얼마나 쉽게 논문으로 출판할 수 있을지를 중요한 고려사항으로 삼고 있다.

과학기술계도 예외는 아니어서 우직하게 한 우물을 깊게 파기보다 유행에 따라 연구 주제를 선택하고, 연구 성과를 발표할 때에도 한 편의 영향력 있는 논문보다 여러 편의 짧은 논문으로 내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 같은 ‘약삭빠름’은 계량적인 평가시스템에 기인한 바 크고, 아마도 우리나라가 단시일에 세계 13위의 논문생산국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 과학은 ‘약삭빠른’ 사람들이 아니라 우직스럽게 한 우물을 수십 년 동안 판 바보 같은 과학자들에 의해 커다란 발전을 이룩해 왔다. 근대 과학의 효시로 보통 영국의 물리학자 뉴턴을 꼽는데, 뉴턴 역학의 기반을 쌓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람들은 케플러라는 독일 천문학자와 튀코 브라헤라는 덴마크 천문학자였다. 튀코 브라헤는 30여년 동안 육안으로 1000개가 넘는 별과 행성의 운동을 관측해 그 위치에 대해 자세한 기록을 남기고 죽었고, 튀코 브라헤의 조수 역할을 했던 케플러는 20년이 넘게 그 자료를 정리하면서 행성운동의 규칙성을 발견해 3개의 수학적 법칙(케플러의 법칙)으로 표현하는 업적을 이룩했다. 이 업적들은 후에 뉴턴이 만유인력 법칙을 발견하고 사람들에게 그 타당성을 설득하는 데 결정적인 근거가 되었다.

최근에 와서 “바보같이 우직하게” 연구해 커다란 업적을 낸 사람으로는 2002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일본의 고시바 마사토시(小柴昌俊) 도쿄대 명예교수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고시바 교수는 일생 동안 우주에서 날아오는 소립자의 하나인 중성미자(neutrino)를 연구해 ‘중성미자 천문학’이라는 분야를 창시하고 “우주를 향하는 새 창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이다. 이 연구를 위해 고시바 교수는 일본의 한 폐광(廢鑛)의 깊은 지하에 수천t의 물을 담은 특수검출기를 건설했고, 이 노력은 지구로부터 17만 광년 떨어진 초신성의 폭발에서 나온 일련의 중성미자들을 검출하는 데 성공하면서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된다. 사실 고시바 교수팀이 당시 검출할 수 있었던 중성미자는 12개에 불과했다. 이처럼 낮은 확률을 바라보면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초신성 폭발에 대비하고 있었던 것은 바보 같은 일인지 모른다.

하지만 이 같은 고시바 교수의 바보 정신이 없었다면 우리는 우주생성 비밀에 대해 아직도 훨씬 무지한 상태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요즘 나라 안팎이 어수선하다. 그렇더라도 국가 미래를 책임진 과학기술계가 흔들려서는 안 될 것이다. 미래의 성장동력을 마련하고 에너지와 자원 위기에 대응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등 해야 할 일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우리 과학기술계는 정부출연 연구소 통폐합 소문과 기관장 교체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어서, ‘바보과학자’들이 우직하게 일할 여건이 되지 못하고 있다. 앞에서 말한 고시바 교수의 연구는 순전히 일본 정부의 지원에 의해 수행되었다. 돈이 될 사업화 가능성도 없고 실험의 결과가 언제 나올지도 모르는 연구 프로젝트에 일본 정부는 장기간 국가 예산을 지원한 것이다. 당장 눈에 보이는 단기적 변화와 성과에 집착하는 우리 정부가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오세정 서울대 자연대학장·물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