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영준의 외교 이야기 ③ ‘결코’라는 말은 결코 써선 안 될 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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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 현장에서 오가는 발언 중에는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곤란한 경우가 많다. 2001년 3월 7일 김대중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 간의 백악관 정상회담이 좋은 예다. 콜린 파월 국무장관은 회담 후 기자들에게 “솔직하고 격의 없는 의견 교환이 있었다”고 브리핑했다. 김 대통령도 비슷한 말을 했다. 얼핏 들으면 처음 만난 두 정상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나눈 것으로 이해하기 쉽다. 하지만 실제 회담 분위기는 썰렁하기 짝이 없었다. 한 배석자는 “김 대통령이 북한의 김정일 정권에 대한 인식과 대북 정책을 길게 설명했는데 부시 대통령은 전혀 수긍하지 못하는 분위기였다”며 “냉정히 말해 실패한 회담”이라고 전한다.

이처럼 ‘솔직한 의견 교환’ 이란 의견 차이가 심각해 회담이 원만하지 못했음을 우회적으로 드러낸 ‘외교 수사(레토릭)’에 지나지 않는다. 협상이 결렬 위기에 빠진 경우에도 “진지한 논의가 이뤄졌다”는 발표가 나온다. 반면 외교관의 입에서 ‘한 걸음 진전이 있었다’는 말이 나오면 이미 여러 걸음을 달려 타결 일보 직전일 가능성이 크다.

외교 수사를 잘못 알아듣고 실수를 하는 경우도 간혹 있다. 지난해 10월 한나라당은 이명박 당시 대통령 후보와 부시 대통령 간의 백악관 면담이 성사됐다고 발표했지만 백악관은 이를 부인했다. 혼선의 원인은 “(면담) 요청을 적극 고려하겠다”는 백악관의 외교적 레토릭을 이 후보 측이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데 있었다.

외교관들은 가급적 완곡하고 우회적인 표현을 사용한다. 그러다 보니 ‘아니오’(No)란 단어는 금기에 가깝다. 마음은 ‘no’지만 입에선 ‘검토해 보겠다’ ‘최선을 다해 보겠다’란 말이 나온다. ‘결코’(never)란 말은 결코 써서 안 되는 말이다. 또한 최대한의 격식을 갖춰 정중한 표현을 써야 한다. “…해서 큰 영광입니다”(I have the great honor to…) 같은 표현들은 말 그대로 ‘입에 붙은’ 소리다.

말이 많거나 지나치게 솔직해도 곤란하다. 협상에 임하는 속셈이나 밑천을 드러냈다가는 상대방에게 끌려 다닐 수밖에 없다. 미국산 쇠고기 파문의 와중에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 미 대사가 ‘실망했다’(disappointed)는 표현을 사용해 구설에 올랐다. ‘실망’이란 말은 ‘유감’(regret)이란 단어에 비하면 외교적으로 매우 이례적인 표현이다. 그는 또 “한국민들이 쇠고기에 대한 과학을 배워야(learn) 한다”고 했다. 한 외교관은 “learn이란 단어에는 ‘배우다’란 뜻 외에도 ‘알다’란 뜻이 있긴 하지만 사려 깊은 표현이 아닌 건 틀림없다” 고 말했다. 베테랑 외교관치고는 너무 직설적인 표현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정직이 최선의 방책’이란 외교 금언에 너무 충실했던 탓일까.

예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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