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5.18단죄와 깨끗한 나라이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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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사건.사고가 많은 것도 외국인에게는 구경거리다.호화백화점이 폭삭 내려 앉았을때 국제워크숍에 참가중이던 한 외국인 교육자가회의장을 박차고 나와 현장으로 달려가는 것을 보았다.출근길에 동강난 한강다리는 CNN이 하도 비춰대 세계적 명물이 되었다.
아직도 그 다리가 어디냐고 찾는 외국인이 있다.
광주 비엔날레에는 외국인을 포함해 150만명이 몰렸다.5.18단죄로 민주 성지(聖地)를 찾는 발길이 잦아질 것은 불을 보는 듯하다.때는 국제회의철.정치부패는 관광자원은 아니지만 풍성한 토론자원(?)이 되고 있다.국제학술회의 치고 노태우(盧泰愚)스캔들을 도마위에 올리지 않고 넘어가는 경우도 드물다.
필자는 지난주 고려대 국제대학원 주최로 사흘간 진행된 「21세기 한.중.일.미」회의에 나온 외국학자들의 의견을 떠볼 기회가 있었다.수치와 충격이라는 점에는 한목소리였지만 하와이 동서문화센터에서 온 스탠리 캐츠박사의 시각은 달랐다.
그는 한국경제 도약기에 미 상무부차관보를 거쳐 아시아개발은행(ADB)수석부총재와 세계은행고문등을 지낸 관료출신이다.그의 말은 한국이 세계은행의 가장 빠른 원조(援助)「졸업국」이었듯이盧씨 사건을 계기로 가장 빠른 「부패졸업국」이 될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며칠전 뉴욕타임스는 10년전만해도 5.18심판을 들먹이는 자체가 쿠데타에의 초청장이었지만 이제 쿠데타는 한국에서 꿈도 꾸지 못한다고 썼다.우리는 드디어 「쿠데타 졸업국」이 되었는가.
졸업장을 받을 사람은 살아 있는 정치군인이다.그리 고 말을 바꾸는 정치지도자들이다.
정치와 전쟁 두세계를 살았던 윈스턴 처칠경은 정치는 전쟁보다위험하다고 말했다.왜냐하면 전쟁에서는 한번만 죽임을 당하지만 정치에선 여러번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민주주의를 외치다 수천명이 피흘린 일이 어찌 십수년 세월의 거적에 덮 인채 어물쩍 넘어가겠는가.
정치지도자들은 5.18을 역사에 맡기려 했다.판도라의 상자를열기가 두려웠다.그들은 한배를 탔기 때문이다.하지만 일렁이는 민의(民意)의 바다위에 떠있는 작은 배인줄 몰랐다.대통령이 갑자기 배의 진로를 바꾼 것을 탓할 것도 없다.거 센 물살에 조타수가 키를 돌린듯 하지만 역사의 물굽이는 이미 그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골목길을 메운 기자들을 향해 내뱉은 전두환(全斗煥)씨의 앙탈도 그 도도한 물살에 허무히 묻힐 수밖에 없다.
이 시대 어둠의 근원은 5.18이다.이제 그 장막이 걷히려 하고 있다.5.18에 임하는 모든 이는 다시는 두번 세번 죽임을 당하는 우(愚)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정치인은 서로의 기소장을 쓰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두번 세번 정치가 죽는 속에 경제는 초죽음하고 국가이미지는 곤두박질한다.우리나라 이름을 가꿀때다. 국가이미지는 전통사회에서 가문의 이름과 같다.우리경제는해외에서 큰 덤터기를 뒤집어 쓰고 있다.한국기업이 해외에서 발행한 주식가격이 한달새 10~20% 떨어졌다.신용장이 줄고 차입조건이 악화되고 이자는 비싸진다.국가이미지는 제품의 빛을 흐린다.국경없는 경제전쟁에서 소비자의 구매심리는 상품의 크기.가격.상표.디자인과 함께 원산지의 국가이미지에 좌우된다.이미지는마음속 그림이다.
기업인들이 지구촌 곳곳에서 기업이미지를 가꾸고 있는 것은 무엇때문인가.군인은 휴전선을 지킬뿐 아니라 유엔평화유지활동(PKO)으로 바깥세계에 나가 있다.나라 이미지가 흐리면 경제와 안보 전사(戰士)들의 땀방울은 보람을 잃는다.
10여년간 한나라를 지배한 최고지도자들이 반란과 무능과 부패의 수괴로 법앞에 설 날이 다가온다.전직대통령 3명이 법정으로끌려가는 서울의 「서편제」엔 또 한번 세계의 이목이 집중될 판이다.기소되는 재벌총수들이 줄줄이 법정에 설 날 도 코앞에 닥친 일이다.
하지만 5.18심판은 카니발이 아니다.썩은 호박을 이리 저리쑤셔보는 「정치테라피」도 아니다.역사청산 과정은 단죄의 결과 못지 않게 중요하다.공정하고 차분하고 준엄해야 한다.이름뿐인 삼권분립은 제몫을 찾아야 한다.
모든 이의 결단이 필요하다.대통령만의 결단이 있는 나라에서는투명사회를 기약할 수 없다.제4부(府)라는 언론도 그 커짐에 걸맞은 빛을 밝혀야 한다.법은 정의(Justice)를 밝히지만언론은 진실(Whole truth)을 밝힌다.
법은 공소시효를 갖지만 언론은 국민의 알권리에 봉사한다.투명사회만이 나라의 이름을 밝아지게 할 수 있다.싱가포르는 자원이없는 소국이기 때문에 깨끗한 나라이름이 필요하다는 리콴유(李光耀)전총리의 말을 되새길만하다.정치부패로 일그러 진 국가이미지를 말끔히 닦아내고 「고요한 아침의 나라」의 활력을 되살릴 때다. (칼럼니스트.政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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