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역사의 증인이 되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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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12.12사태와 5.18광주민주화항쟁 무력진압의 주역 전두환(全斗煥)전대통령이 2일 오전9시30분 국립묘지 현충탑 위패봉안관 앞에 고개숙였다.같은 시각 12.12사태 당시 반란군과 반란진압군으로 각각 동원됐다 희생된 두 젊은이가 묻힌 묘소에는정적만이 감돌았다.
이들은 한때 서로의 목에 총부리를 겨눈 입장이었지만 죽어서나마 구원(舊怨)을 풀려는듯 10여의 거리를 두고 현충탑 서쪽 묘역에 함께 묻혀 불행한 역사의 산증인이 됐다.
국방부 헌병대소속으로 총장공관을 지키다 반란군에게 사살된 정선엽(鄭善燁)병장과 33헌병대 소속으로 반란군에 동원된 朴윤관상병이 그 주인공들.
두 사람 모두 12일밤의 총격전으로 중상을 입고 수도통합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다음날 사망했다.朴상병은 80년2월 국립묘지에묻힌 반면 반란진압군으로 나선 鄭병장은 한달쯤뒤에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 있었다.
『반혁명군은 국립묘지에 묻힐 수 없다』는 당시 군부의 반대때문이었다.결국 鄭병장은 가족들의 항의로 뒤늦게 이곳에 안장됐다.이들이 묻힌 묘소 건너편 묘역에는 총상을 입고 강제 예편,불우한 말년을 보내다 자살한 정병주(鄭柄宙)전특전사 령관(최근 자살이 아니라는 의혹 제기)과 鄭씨의 비서실장으로 총격을 받고숨진 김오랑(金五郎)중령(당시 소령)이 잠들어 있다.동쪽 29묘역에 묻힌 金중령은 12.12사태 다음날인 13일 오전1시30분쯤 鄭사령관을 체포하러 온 무장반 란군에 맞서 권총으로 응사하다 하반신에 집중적인 총격을 받고 그 자리에서 숨졌다.
남편의 비명횡사에 충격을 받고 두 눈을 실명한 金중령의 부인백영옥(白榮玉)씨는 金중령이 숨진지 12년만인 91년6월 자신의 아파트 3층에서 투신,남편의 곁으로 돌아갔다.
또 왼팔에 총상을 입은 채 체포돼 보안사 서빙고분실에 끌려가혹독한 고문을 받았던 鄭씨는 89년3월 경기도양주군장흥면 야산에서 숨진채 발견됐다.충직한 부하 金중령의 묘소 참배를 잊지 않았던 鄭씨는 아들들에게 자신이 죽은 후에도 金 중령의 참배를잊지말 것을 당부했다.
김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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