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리 푸틴 ‘마음은 아직 대통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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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가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 첫 해외 출장지로 프랑스를 방문하면서 여전히 국가 정상과 같이 행동했다고 러시아 일간 코메르산트 등이 지난달 31일 보도했다. 프랑스도 관례를 깨고 푸틴 총리를 국빈급으로 예우했다. 푸틴이 후계자인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에게 권좌를 물려준 뒤에도 국가 최고 지도자로서의 권위와 영향력을 유지할 것이란 관측이 그대로 맞아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지난달 29~30일 프랑스를 방문한 푸틴은 의전상 자신의 상대가 되는 프랑수아 피용 프랑스 총리와는 겨우 한 시간 남짓 회담하는 데 그쳤다. 반면 저녁 시간 대부분은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이 엘리제궁에서 베푼 만찬에서 보냈다. 프랑스는 외교상 관례를 깨고 대통령이 직접 러시아의 ‘실세 총리’를 위해 만찬을 베푸는 성의까지 보인 것이다. 푸틴은 30일에는 자크 시라크 전 프랑스 대통령을 만나 양국 관계를 논의했다. 그는 지난달 31일 프랑스 일간 르몽드에 실린 인터뷰에서 ‘의전상 관례를 벗어나는 사르코지 대통령과의 만찬은 러시아에서 누가 외교를 책임지는지에 대해 혼란을 불러일으킨다”는 질문을 받고 “나는 국가안보회의 일원으로서 외교 문제에 어느 정도 관여할 뿐 최종 결정은 대통령이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방문 기간 중 스스로를 대통령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피용 총리도 푸틴을 세 번이나 대통령이라고 불러 주위를 당황케 했다.

푸틴은 국가 정상이나 할 수 있는 외교적 발언도 거침없이 쏟아냈다. 그는 르몽드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을 ‘무서운 괴물’에 비유하며 프랑스가 대미 관계에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달라고 요구했다. 푸틴은 “미국은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를 옛 소련 국가인 우크라이나와 그루지야로까지 확대하려 하고 있다”며 “이는 유럽에 새로운 베를린 장벽을 세우려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미국의 일방주의와 나토 확대 등을 강하게 비판하던 대통령 시절의 독설을 그대로 반복한 것이다.

러시아 헌법상 외교정책은 대통령의 전권 사항이어서 총리가 이에 대해 발언하는 것은 월권행위로 비칠 수 있다. 그럼에도 푸틴은 외교 현안과 관련한 자신의 견해를 거리낌없이 밝힘으로써 최고 지도자로서의 위상을 유지하고 있다는 걸 증명한 것이다.

유철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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