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잠입자" 믿음잃은 현대인 이중의식 묘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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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무슨 소원이든 성취시켜주는 방이 있다고 상상해 보라.그 방앞에는 이루지 못한 꿈을 가진 사람들이 길게 줄지어 서있다.백만장자,혹은 유명한 예술가가 된다는 희망에 부풀어.그러나 그 방이 자신이 얘기하는 소망을 들어주지 않고 가장 은 밀한 잠재의식의 소망을 들어준다면,그래서 만약 아내와 통정한 남자를 살해하고 싶은 강한 충동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빌어도 그는 살인자가 될 수밖에 없다면,당신은 그방에 들어가겠느냐.이 철학적인 물음을 시적인 영상속에 담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걸작 『잠입자』(원제:Stalker)가 비디오로출시됐다.79년 타르코프스키가 소련을 떠나기전 마지막으로 만든『잠입자』는 80년 칸 영화제 프랑스비평가상 수상작.타르코프스키가 남긴 7편의 영화 중에서 가장 무겁고 진지한 작품으로 헌신적인 사랑의 강한 집착 때문에 서구비평가들로부터 근본주의적이라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스토리는 간단하다.법칙에 얽매인 세상에 권태를 느끼는 작가와이 세상에 행복은 없다고 믿는 교수가 잠입자의 도움을 받아 신비의 「방」에 다녀오는 얘기다.잠입자는 삶의 희망을 잃은 사람들을 「금지구역」에 있는 방으로 안내하는 일을 천직으로 알고 있는 인물.그러나 자신은 「방」안에 들어갈 수 없다.
작가와 교수는 죽음을 무릅쓰고 목적지에 도달하지만 「방」에 들어가지 않고 돌아와 버린다.왜냐하면 여행중에 들은 「고슴도치」의 전설 같은 얘기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고슴도치」는 「방」에 들어가 죽은 동생을 살려달라고 빌었지만 이 소망 대신은밀하게 꿈꾸었던 백만장자가 된 인물.그는 자신의 내면에 부끄러움을 느낀 나머지 자살한다.
작가와 교수가 그 방에 들어가지 않은 이유는 「방」의 신비로운 힘과 자신들의 내면 어느쪽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잠입자는 이 여행에서 돌아와 『그들은 믿는 힘을 쓰지 않아 고갈되고 말았어』라고 한탄한다.그리고 굳은 신념을 가졌 던 잠입자 역할에 회의를 느낀다.
타르코프스키는 이 얘기를 통해 과학과 지성으로 무장했지만 믿음의 힘을 상실한 현대인의 삭막한 내면을 보여준다.그는 이타적인 실천철학으로 무장한 잠입자조차도 철학적 세련미에 도취돼 있는 인물이라는 점을 암시한다.그가 희망으로 제시하 고 있는 인물은 아무런 사상도 내세우지 않고 잠입자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쏟는 그의 아내다.인간의 가장 밑바닥을 이루는 평범하고 기본적인 능력,사람을 사랑하는 능력에서 타르코프스키는 희망을 발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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