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구의 역사 칼럼] 新여성 인수대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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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호 39면

얼마 전 선배와 재미있는 얘기를 나눴다. 선배 말은 ‘어우동’이 구시대 여성이라는 것이다. 흔히 ‘어우동’은 시대를 앞서간 여자로 꼽힌다. 조선시대에 감히 자기 감정에 충실하고 그 많은 남자와 관계를 맺었다니! 찬찬히 생각해 보면 이 시기 ‘어우동’ 같은 여자는 그렇게 드물지 않았다. 감동도 있지 않은가.

초기에 조선은 큰 변화 속에 있었다. 유교사회로 가려는 움직임 때문이다. 아직도 고려적인 모습이 많이 남아 있었지만 대세는 변화였다. 이런 중에 ‘어우동’은 사실 변화 쪽보다는 살아오던 대로 산 사람에 속한다. 그래서 ‘구여성’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인수대비는 달랐다. 대비는 시대가 바뀌고 있다는 것을 캐치한 사람이었다. 인수대비라면, 지난번 불교를 옹호했다는 그 인수대비를 말하는가. 그렇다. 불교와 친밀성도 있었다. 그런데 1475년(성종 6) 인수대비는 『내훈』을 지었다.

“인수대비는 딸이나 며느리들의 어리석음을 근심하여 부지런히 가르쳤다. 그러나 『열녀전』 『여교』 『명감』 『소학』 등의 책은 양이 많아 처음 배우는 사람들이 너무 힘들어하였다. 이에 인수대비는 직접 책들을 보면서 긴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발췌하여 7장으로 만들고 ‘내훈’이라고 이름하였다. 이어 한글로도 옮겨 쉽게 이해하도록 하였다.”

인수대비의 측근이 전하는 대비의 『내훈』 제작 의도다. ‘딸과 며느리들의 어리석음을 근심하여’ 이 책을 만들었다고 한다. 인수대비는 조선이 곧 유교에 의해 주도되리라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딸과 며느리’인 여자들이 거기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면 결국 손해를 보는 것은 여자들이라고 봤다. ‘어리석음을 근심’한다는 것은 그런 뜻이다. 이런 생각의 연장선상에서 성종과 불화하는 며느리 윤씨(연산군의 어머니)도 폐비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사실 좀 무리가 따르는 조치였다. 그래서 인수대비는 오늘날 ‘신여성’이 아닌 ‘왕보수’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인수대비는 당시로서는 선진적인 사람이었다. 아직 사림파가 도덕으로 조선사회를 좌지우지하기도 전이다. 그런 시기에 독립적인 여성 교훈서를 내놓았다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여성을 유교화한다는 것은 분명 여성을 일정한 틀 속에 넣는 일이었지만 또한 여성에게 중심 문화에 들어가는 기회를 주는 것이기도 하다. 게다가 인수대비는 끝까지 불교에 대해서도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불교는 기존 질서를 의미한다. 신구(新舊)의 조화를 생각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각 시대에는 각 시대의 현안이 있다. 조선 초기 유교화는 선진화의 문제였다. 오늘날의 입장에서야 유교(특히 성리학)라는 게 보수적인 그 무엇이지만, 그 시대에는 첨단 사상이었다. 역사를 그 시대의 상황에서 이해하는 것은 역사를 바라볼 때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안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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