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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사스·뎅기열…‘전염병의 세계화’ 경고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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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호 06면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사스)이 전 세계를 강타했던 2003년 4월, 중국의 한 철도역에서 가스 마스크까지 쓴 한 대학생이 기차를 기다리고 있다. 중앙포토

정부는 최근 중국 여행객을 대상으로 검역 시스템을 강화하고 있다. 이달 들어 엔테로 바이러스에 감염된 수족구병 환자가 중국 전역에 3만 명 가까이 발생했고 베이징에서까지 사망자가 나왔기 때문이다. 또 한·중·일 정부는 지난해부터 ‘질병관리전문기구 포럼’을 매년 열기로 했다. 한번 발생하면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져 나가는 전염병에 대해 좀 더 긴밀한 협의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 계기는 AI의 유행이다. 우리나라와 일본은 아직 인체 감염자가 발생하지 않았지만 중국만 해도 지금까지 30명의 감염자가 생겨 이 중 20명이 사망했다.

種·국경을 뛰어넘는 바이러스의 공습

시공을 초월하는 ‘팬데믹’

2003년 3월 15일 홍콩발 베이징행 캐나다 항공기에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생을 만나고 돌아가던 중국인 노인이 탑승했다. 대만·싱가포르의 관광객과 캐나다인 승무원 등도 함께 타고 있었다. 며칠 후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간 22명의 탑승객 및 승무원은 알 수 없는 고열과 호흡 곤란, 폐렴 증세 등을 호소했다. 사스가 중국인 노인을 통해 바다를 건너 순식간에 퍼져 나간 것이다.

21세기 들어 발생한 첫 신종 전염병인 사스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변종이 원인이다. 2002년 11월부터 2003년 8월까지 중국·싱가포르·캐나다 등 총 30개 국가에서 8422명의 환자가 발생해 11%의 치사율을 보였다. 국내에서도 의심환자들이 발생했으나 감염자로 최종 확인된 경우는 다행히 없었다. 을지의대 최석민(신경외과·감염위원장) 교수는 “1330년대 중국에서 발생한 페스트(흑사병)균은 1347년에야 이탈리아에 도착했고 전 유럽에 퍼지는 데 4년이나 걸렸다. 또 말라리아는 이탈리아 반도 전체에 퍼지는 데 거의 1500년이 걸리기도 했다”며 “하지만 사스는 2003년 2월 홍콩에서 열린 학술대회 이후 전 세계로 퍼지는 데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제 지구 저 반대편에서 발생한 전염병에 대해서도 전혀 안심할 수 없게 됐다. 전염병이 범세계(대륙)적으로 유행되는 현상을 ‘팬데믹’이라고 한다. ‘pan(모두)+demic(사람)’이란 그리스어에서 유래했다. 1998년 뎅기 바이러스에 의한 뎅기열이 세계 56개국에서 120만 명의 감염자를 낸 것이 팬데믹의 대표적인 예다. 팬데믹은 막대한 경제적 손실도 초래한다. WHO는 사스가 관광 분야 등에서 아시아 국가들에 미친 경제적 손실은 2003년 국내총생산(GDP) 기준으로 200억 달러에 이른 것으로 추산했다. 항공기를 통해 바이러스 대륙 간 전파가 더욱 쉽고 빨라졌다. 99년 8월 미국 뉴욕주에서 발생한 뒤 몇 년간 전 북미 대륙을 공포에 떨게 한 웨스트 나일 뇌염의 경우 아프리카나 유럽 등에서 항공기를 타고 온 모기에 의해 미국에 전파된 것으로 보건당국은 추정했다.

인수(人獸) 공통 전염병 200개 넘어

더스틴 호프먼이 주연한 영화 ‘아웃브레이크’는 에볼라 바이러스가 인류를 치명적인 위기에 빠뜨린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실제로 치사율 90%가 넘는 이 바이러스의 감염 경로는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영화에서는 원숭이를 바이러스의 매개체로 그렸다. AI나 사스는 각각 조류와 사향고양이를 매개체로 한다는 점만 다를 뿐 그 위험성은 영화와 현실이 비슷하다. AI(H5N1형)의 경우도 97년 홍콩에서 첫 감염자가 나오기 전까지는 조류가 돼지에게만 전염시킬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변이를 일으킨 AI 바이러스는 가금류뿐 아니라 인간 세포를 뚫고 들어갈 수 있는 열쇠를 거머쥐었다.

98년 10월 말레이시아에서 발생, 약 7개월간 모두 90만여 마리의 돼지가 도살 처분되고 사람 105명이 사망한 니파 바이러스도 역학조사 결과 야생 박쥐가 돼지를 물어 생긴 것으로 밝혀졌다. 박쥐가 갖고 있던 니파 바이러스가 돼지에 감염되고, 돼지를 매개로 사람과 말·개·고양이 등으로 전파된 것이다. 이처럼 동물과 인간이 함께 걸릴 수 있는 바이러스성 인수 공통 전염병은 200여 가지에 이른다. 바이러스가 종(種)간 장벽을 넘으려면 오랜 시간의 접촉과 많은 양의 공격이 필요하지만, 환경의 변화는 이 가능성을 점점 높여주고 있다.

인간이 ‘괴바이러스’를 부른다

서울대 의대 최강원(감염내과) 교수는 “문명 발달로 인한 급격한 생태계 변화로 그동안 노출되지 않았던 병원균과 접촉할 기회가 늘면서 기존에 알려지지 않았던 바이러스성 전염병이 급격히 늘었다”며 “환경 공해로 인한 돌연변이와 스트레스로 인한 면역력 저하, 이상기온 현상 등도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니파 바이러스 뇌염의 경우 말레이시아의 대대적인 삼림 벌목으로 서식지를 잃은 과일박쥐가 주거지까지 침입하게 된 것이 원인으로 추정된다. 고려대 의대 바이러스병연구소 송진원(미생물학과) 소장은 “93년 미국 애리조나와 뉴멕시코주에서 치사율 70~80%를 보이며 대유행한 한타 바이러스 폐증후군도 그 전해의 엘니뇨 현상으로 인한 기후 변화 때문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강수량이 많아지고 기온이 높아지면서 한타 바이러스의 감염원인 설치류 야생쥐의 개체수가 폭발적으로 늘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도 온난화에 따른 열대성 전염병의 유입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이화여대 최재천 석좌교수는 “지구온난화로 인해 앞으로 3~4년 후부터는 그동안 우리가 겪지 않았던 전염병을 해마다 겪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최 교수는 “뎅기 바이러스를 장전한 모기들이 한반도를 공습하는 것은 그야말로 시간문제”라며 “기후 변화에 따른 전염성 질환에 대해 체계적인 생태역학적 연구가 시급하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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