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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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피로연장 손님들이 음식 접시를 손에 들고 좌정하자 정길례여사는 테이블을 돌며 두루 인사했다.
맨먼저 아리영 일행이 앉은 데로 와 미스터 조와 아리영 사이에 섰다.
『와주셔서 영광입니다….맘껏 드셔서 축하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깍듯이 인사하고나서 그녀는 테이블 위에 덮인 식탁보를 바로 잡았다.미스터 조 앞자리가 쿨렁하게 부풀어 있었기 때문이다.연분홍 산호의 투각(透刻)가락지가 끼어진 그 손을 미스터 조는 멀거니 내려다 보고 있었다.복숭아빛 갑사 저고리 소매 너머비쳐보이는 팔이 섹시했다.
그 순식간의 손짓에서 아리영은 「교신(交信)」을 느꼈다.아내가 남편의 옷깃을 여며 매만져주는 듯한 친압(親狎)함 같은 것이었다. 어쩌면 오버 센스일 수도 있는 그 인상은 이상스럽게도아리영 머리 한쪽에 쇠녹처럼 눌어붙어 지워지지 않았다.
『…야외 결혼식이 멋있었어요.신부도 아름다웠지만 신부 어머니도 아주 매력있었지요?』 결혼식 얘기를 슬그머니 꺼내며 미스터조를 떠봤다.
흘긋 아리영의 눈치를 살피고 그는 입을 떼었다.
『실은 그 분은 내 대학 1년 후배요.한서클에서 친하게 지냈지.대학원 제자가 장가든다기에 가봤더니 바로 신부 어머니더군.
대학 나온 후 처음 봤으니 20몇년만인가? …참,친구 사이라 했던가? 계(契)모임 친구같은 거야?』 아리영과 길례의 나이가열살쯤이나 벌어지는 것이 의아했는지 농담처럼 물었다.
『계같은 건 안해요.「박물관 대학」이라는 문화강좌 동기생이었지요,서을희여사님이랑.』 어느새 어두움이 스며들고 있었다.미스터 조는 일어나 마루 한 구석으로 가더니 성냥을 그어 램프에 불을 밝혔다.진흙 종지의 오일 램프였다.
아,저 램프의 불빛! 뉴델리의 디왈리 축제날 밤 일이 그 오롯한 불빛 속에 일렁이었다.미스터 조와 처음 맺어진 그 아프고감미한 밤 일.
『우유기름을 써야 하는데,우리나라엔 없으니까 대신 유채꽃씨 기름을 쓰고 있어.』 인도의 최대 축제중 하나인 디왈리 날 밤,인도사람들은 집집마다 우유기름을 담은 진흙 종지에 불밝혀 번영의 여신(女神)락슈미를 맞아들인다.
그날부터 꼭 20년이 지났다.한해인들 그 날을 쓰리지 않게 지낸 적이 없었고,목마르게 그를 원해왔다.
그가 지금 여기에 있다.아무 일도 없었던 듯 선선하게 서있는그를 보며 왈칵 눈물이 치솟았다.지난 20년은 대체 무엇이었는가.미스터 조가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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