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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박경리를 말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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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호 06면

어머니·아버지·남편에 대한 연민과 증오
“나는 이혼한 가정에서 자랐어요. 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때 집을 나가셨는데, 어머니는 세속적이며 생활력이 강한 여인이었지요. 어머니의 그런 모습에서 나는 강한 저항감과 홀로 남은 어려움에 대한 연민의 정을 동시에 느꼈지요. 어머니에 대한 연민은 곧 남자에 대한 일종의 혐오와 증오심으로 바뀌었어요. 열여덟에 나를 낳고 가출하신 아버지는 나를 두려워했지요. 나는 그에게 본질적으로 저항했습니다. 그것이 남자에 대한 지배욕은 아닐 거예요. 다만 눌리지는 않으리라는 독한 마음이었으니까.”-1994년 가을 ‘작가세계’ 송호근 서울대 교수 대담

“초등학교 때부터 굉장히 수줍음이 많고 항상 남의 뒷전에 서 있는 성질인데 서점에 가서는 그게 없어요. 쫓겨나도록 붙어 서서 읽는 거예요. 여학교 시절에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읽으려고 제가 결석했어요.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엄살 피우고. 그 책 보려고요. 하루만 빌린 책 세 권을 다 보려고 밤을 새우고 나니깐 아침에 눈이 핏빛이에요. 독서량이 내 모든 기초지요. 그런 것이 다 모여 모여 가지고 ….”-2004년 9월 마산MBC 송호근 교수 대담

“개인의 불행도 불행이지만 우리나라 전체가 불행했잖아요. 6·25전쟁을 겪고 얼마 안 된 시기잖아요. 대한민국 산천에 불행한 사람이 너무 많은 거예요. 많은 사람이 죽었죠. 내 편, 네 편 갈려서 동족이 물어뜯고 싸운 거 아니에요? 나는 전쟁 미망인이었습니다. 불행의 상징이죠. 가난하고, 애 데리고, 부모 모시고, 혼자 벌어먹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소망이 있기에 써온 것이죠. 불행에서 탈출하려고.”
“남편은 어리석은 사람이어서 꾀 부릴 줄 몰라 죽은 거죠. 박정희 시대도 무서웠지만 난 자유당 시절이 더 무서웠어요. 파출소의 빨간 등만 봐도 겁이 났습니다. 입 꽉 다물고 살았어요. 내 스스로 벽을 쌓고 또 쌓고, 돌다리도 두드리는 심정으로 살았습니다. 그러지 않았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을 거예요.”-2005년 1월 ‘신동아’ 인터뷰
“마지막 장(章)을 끝낸 그날 밤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가족 몰래 울었다. 전쟁의 상처는 아무 곳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일년 반의 괴로운 날들이 생각나서. 희열과 절망의 연속 속에 원고 보따리들을 싸 들고 전전하던 일은 아마 오랫동안 잊지 못하리라.”-1964년 장편소설『시장과 전장』서문

“이젠 안 웁니다. 허탈과 고생의 울분 같은 거겠지만 역시 감정의 찌꺼기일 뿐입니다. 그때도 역시 제 자신이 작품 안에 들어갔지만 이제는 완전한 쟁이가 되어 객관적으로 쓰겠습니다. 잔인하고 무자비하게 나를 다루어 아무 찌꺼기도 남기지 않겠습니다.”-1970년대 언론 인터뷰

“제 삶이 평탄했다면 글을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삶이 문학보다 먼저지요. 모든 인생이 그렇잖아요. 중간중간 불행도 있고 … 인생은 물결 같은 것이거든요.”-1994년 10월 『토지』완간 기념 소감

내 마음 속의 피멍, ‘토지’를 쓰던 시간
“어떤 분은 내가 글 쓰기 위해 원주로 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그건 내게 사치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나는 인생만큼 문학이 거룩하고 절실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구동의 뜨락은 꽤 넓었고 그것이 내 세계의 전부였습니다. 삶은 준열하고 나날의 노동 없이는 내 자신이 분해되고 말 것만 같았고 긴장을 푸는 순간 눈을 감은 채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것만 같았습니다. 모든 것을 거부하고 포기했으며 오로지 목숨을 부지한 것은 가엾은 내 딸, 손자의 눈빛 때문입니다. 그때 머리가 다 빠지고 철색으로 변한 딸아이의 얼굴은 아직도 지워지지 않은 내 마음속의 피멍입니다. 진실에 도달할 수 없는 언어에 대한 몸부림, 그럼에도 우리는 그 언어에서 떠나질 못합니다. 그게 문학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 시절 거부하고 포기한, 극한적 고독의 산물이 『토지』였을 겁니다.”-2000년 9월 ‘현대문학’

“목숨이 있는 이상 나는 또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고, (암 수술을 받고) 보름 만에 퇴원한 그날부터 가슴에 붕대를 감은 채 『토지』의 원고를 썼던 것이다. 백 장을 쓰고 나서 악착스러운 내 자신에게 나는 무서움을 느꼈다. 어찌하여 빙벽에 걸린 자일처럼 내 삶은 이토록 팽팽해야만 하는가. 가중되는 망상의 무게 때문에 내 등은 이토록 휘어들어야 하는가.”-1973년 6월 『토지』 서문

“4부 3편 8장에서 조찬하가, 유인실이 임명희의 제자인 것을 임명희를 통해 들었는데 그것을 새카맣게 잊었다는 대목은 땜질이었다는 것을 고백한다. 그것은 조찬하가 잊은 것이 아니라 작가가 잊은 것이다. 시간과 원고료에 대한 과욕이 저지른 이 같은 차질이 참으로 부끄럽다”-1994년 『꿈꾸는 자가 창조한다-박경리의 원주통신』

“알아? 이 재봉틀 믿고 원주로 왔어. 이 재봉틀 믿고 『토지』를 시작했지…. 실패하면 이걸로 삯바느질을 한다, 다만 내 문학에 타협은 없다.”- 2008년 5월 소설가 공지영 ‘박경리 선생 영전에’

작가는 통념을, 고정관념을 뒤엎어야
“다른 세계와 교신하려는 우리들의 소망, 이것이 한(恨)입니다.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이루려는, 추구하는 행위만큼 미래지향적이죠. 우리 사상의 근본은 이것입니다.”-1994년 가을 ‘작가세계’

“우리의 한이라는 것은, 내가 너무 없는 것이 한이 되어서 … 말하자면, 내가 뼈가 빠지게 일해서 땅을 샀다. 내가 무식한 것이, 낫 놓고 기역자 모른 것이 너무나 한이 되어서 내 자식은 공부시켰다. 미래지향이거든요. 소망이거든요. 이게 절대로 퇴영적인, 부정적인 정서가 아닙니다.”-2004년 마산 MBC

“일제 식민 미학이 곡선을 비극적 미의식으로 규정하는 의도가 뭐겠습니까? 곡선은 결코 비극적이지가 않아요. 조선 백자를 보십시오. 백자의 그 넉넉하고 둥근 선은 힘으로 긴장감이 꽉 차 있습니다. 터질 것 같은 힘을, 그러나 고요하게 머금고 있는 게 조선 백자의 곡선입니다. 그 곡선은 결코 패배감에서 나오는 센티멘털한 비장미가 아닙니다.”-1986년 가을 ‘문예중앙’ 황지우 시인 대담

“저는 원고지를 메울 때마다 언어가 도망가는 것을 봅니다. 가슴에 차오르는 것을, 감동을 글로 옮기려고 하면 그것이 저만큼 달아나 버립니다. 그 달아나는 말들을 붙들기 위해 쓰고 쓰고 또 씁니다. 한을 풀기 위한 노력입니다.”-1966년 『Q씨에게』

“작가는 사람들이 누구나 다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의 반대편을 보아야 하고, 그것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수많은 통념을, 고정관념을 뒤엎어야 해요.”-1986년 가을 ‘문예중앙’

대관절 어쩌려고들 이러는 건가
“Q씨, 싸움은 무자비한 것입니다. 자신과의 싸움은 더욱더 무자비한 것입니다. 그러나 Q씨, 당신은 싸움의 무자비함에 아름다움의 쾌감이 있었다 할 것 같으면 얼굴을 찌푸리시렵니까? 적당히 무풍지대에서, 목욕탕 속의 온도 같은 곳에서 사는 사람들은 이상하게 그것을 사갈시하더군요. 이방인을 보듯 청승궂다고 혀를 차며, 아이구 딱하기도 하지, 귀부인의 속성을 지닌 지식인들 말입니다…지식인들의 애매하고 적당하게 하는, 그 애매함에 인간 마성이 숨 쉬고 있는 것이나 아닐는지요. 애매함이 정당으로 둔갑하고 질서로 둔갑하고, 누구를 쳐부수고 매장하는 무기로 둔갑하고, 보이지 않는 법률로 둔갑하고, 강자가 약자를 짓밟는 방편, 정신적인 살해, 무엇이든 어떠한 악도 합리화할 수 있는 그 애매모호한 유령 말입니다.”-1966년 『Q씨에게』

“대관절 어쩌려고들 이러는 건가, 어디까지 가야만 사람들은 직성이 풀리는 걸까요. 뽑히고 버혀지고 멸종하는 초목, 깎이고 막혀버리고 숨통이 죄어 드는 산천, 갈 곳을 잃고 죽어가는 조수, 넋이 있다면 통곡이 지상에 충만할 것을… 다만 생존만을 원하며 세상이 막히지 않고 돌아가게 자리매김한 생명들을 무더기 무더기 대량학살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 것인지, 신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신의 뜻으로 생각하는지요. 달리는 기차 앞에 나무 막대기 하나의 역할도 못하면서 나는 왜 지치지도 않고 지껄여야 하는지요.”-2000년 3월 ‘현대문학’

“진짜 후진국이에요, 야만에 가까울 정도로. 과거의 높은 문화수준에서 말도 못하게 후퇴했어요. 화도 나지 않을 정도예요. 정치하는 사람들, 처음에는 국민에게 머리 조아리고 잘 하겠다고 해서 국회에 보냈는데 결국 어떻게 됐습니까. 국민이 그 사람들 뒷바라지하느라 뼈 빠집니다… 이념이라는 게 뭐예요. 인간들이 잘살게 하기 위한 방법 아닙니까. 그런데 이념이 따로 놀아요. 세상에 생존보다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이 생태계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에서 이념이라는 허공에서 싸울 이유가 없어요. 이념보다는 한 숟가락의 밥이 필요해요.”-2004년 1월 중앙일보 인터뷰

“사랑이라는 것이, 가장 순수하고 밀도도 짙은 것은 연민이에요, 연민. 연민이라는 것은 불쌍한 데 대한 것, 말하자면 허덕이고 못 먹는 것에 대한 것, 또 생명이 가려고 하는 것에 대한 설명이 없는 아픔이거든요. 그것에 대해 아파하는 마음, 이것이 사랑이에요. 가장 숭고한 사랑이에요.”-2004년 9월 마산 MBC

내 생명 저울질하는 것 같아 약 먹기 싫어
“어디 지리산뿐일까마는 산짐승들이 숨어서 쉬어볼 만한 곳도 마땅치 않고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식물, 떠나버린 생명들, 바위를 타고 흐르던 생명수는 썩어 가고 있다 한다. 도시 인간들이 이룩한 것이 무엇일까? 백팔번뇌, 끝이 없구나. 세사(世事) 한 귀퉁이에 비루한 마음 걸어놓고 훨훨 껍데기 벗어던지며 떠나지 못하는 것이 한탄스럽다. 소멸의 시기는 눈앞으로 다가오는데 삶의 의미는 멀고도 멀어 너무나 아득하다.”-2001년 12월 『토지』서문

“기운이 없으니까 퍼질러 앉아 일을 해요. 허리 때문에, 다쳐서 못하고 앉아서 해요. 김민기씨가 내 흉을 보더래요. 선생님 일하는 거 보니까 기가 차더라. 기어 다니면서 하더라고. 정말 기어 다니면서 일을 해요.”-2004년 마산 MBC

“행복해. 토지문화관도 그럭저럭 꾸릴 만해. 건강은, 나이가 있으니까…. 원래 먹어야 하는 약이 많아요. 하지만 혈압약만 먹어. 병원에도 1년에 두 번 정도만 가고. 살아 보겠다고 날마다 약 먹고 병원 가고 하는 거, 내 생명을 저울질하며 사는 거 같아서 싫어.”-2007년 6월 중앙일보 인터뷰

“어머니가 저를 뱄을 때 흰 용이 방을 차고 들어오는 꿈을 꿨답니다. 파란 눈알이 박힌 흰 용을 본 태몽이기에, 아들을 낳는 줄 알았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딸로 태어난 제가 어머니께 불효 많이 했어요. 오늘 밤 꿈에서라도 어머니를 뵐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2008년 4월 조선일보 인터뷰

“모진 세월 가고 /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2008년 4월 마지막 남긴 시 ‘옛날의 그 집’ 중


토지문화관 운영은 종전대로
박경리 선생 타계 후 토지문화관(www.tojicul.co.kr)은 어떻게 될까. 토지문화관은 고인이 말년을 보낸 공간이자 생전 “작가 창작실을 10개 더 내고 싶은 욕심도 있다”고 밝힐 만큼 애착을 가졌던 곳이다. 관리를 맡고 있는 토지문화재단 권오범 사무국장은 “김영주(박경리의 딸) 관장과 협의해 봐야겠지만 현재로선 기존 사업에서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존 사업이란 문인·문화예술인 창작 집필실 운영 지원과 토요문학강좌를 이른다. 특히 창작 집필 지원은 고인이 필생의 숙원처럼 생각하던 일. 문인들이 아늑하고 편안한 공간에서 숙식 걱정 없이 글쓰기에만 전념할 수 있게 해준 것이다. 1999년 토지문화관이 문을 연 이래 나희덕·김선우·박범신·윤대녕·은희경·백가흠씨 등 ‘신세 진’ 시인·소설가는 수백 명이 넘는다. ‘한국문화와 정서를 작품을 통해 자국에 소개토록 한다’는 조건 하에 외국 문인과 재외동포 문인에게도 개방했다. 문인 외에도 김민기(연극)·김도경(회화)·이광모(영화)·김미선(음악) 등 다양한 문화예술인이 토지문화관의 품에 머물렀다.

강원도 원주시 흥업면 매지리 회촌마을 오봉산 기슭에 위치한 토지문화관은 회의실·도서관·식당 등이 있는 본관과 집필 공간으로 제공되는 매지사(梅芝舍)·귀래관(貴來館) 등 3개 동으로 이뤄져 있다. 원주 시내에 있던 고인의 옛집이 개발되자 보상비에다 토지공사의 지원(4억원)을 받아 이곳에 터를 잡았다. 유료 대관과 별도로 창작 지원 대상에 선정된 문인들에겐 무료로 숙식을 제공한다. 경비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강원도·원주시 등 지자체 지원금으로 충당해 왔다.

문화예술위 관계자는 “매년 지원을 늘려 지난해 연 8000만원이, 올해는 1억원이 책정됐다”며 “연 단위로 책정되기 때문에 향후 지원 여부에 대해선 확정된 바 없다”고 말했다. 원주시 관계자는 “외국 문인 체류 지원 등 시가 예산을 지원해 오던 사업은 종전처럼 진행될 것”이라고 밝혔다.

유품 모은 자료관 8월 개관
총 5부 21권에 이르는 『토지』는 원고지로 따지면 4만여 장 분량이다. 이 필생의 대작은 육필로 쓰였다. 박경리는 올 ‘현대문학’ 4월호에 발표한 마지막 시(‘까치 설’ 등 3편)까지 평생을 펜으로 작업했다. 하지만 출판사가 수차례 바뀌는 동안 『토지』의 친필 원고는 대부분 소실된 것으로 알려졌다. 생전의 선생도 “작가에게 작품을 제외하고는 잉여물이다. 나는 따로 서재가 없어 원고지가 쌓이면 불쏘시개로 쓰곤 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일부 남은 원고는 『토지』 연구자 등 지인들이 소장 중인 것으로 파악된다.

흩어져 있는 유품은 8월 15일 토지자료관이 문을 열면 한자리에 모일 것으로 보인다. 고인이 『토지』를 집필했던 원주 시내 옛 집에 조성된 토지문학공원에서 가까운 곳이다. 지하 1층, 지상 5층 규모의 건물에 『토지』와 관련한 사료·영상물 등을 전시하게 된다. 토지문학공원 고창영 소장은 “토지문화재단과 협의해 선생의 유품을 한자리에 모으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원주시 측이 낙관하는 것은 고인이 생전 내렸던 ‘솔로몬의 판결’ 때문. 경남 통영에서 태어난 선생은 강원도 원주에서 『토지』를 집필하고 생을 마쳤다. ‘토지의 고향’ 원주와 ‘박경리의 고향’ 통영의 이해가 은근히 엇갈리는 상황. 선생은 토지문화관 뒤 산자락에 묘 터를 사두기까지 했지만 지난해 12월 통영에 다녀온 뒤 생각이 바뀌었다.

“나 죽으면 반반씩 나눠 가지라”며 “유해는 통영에 묻으라”고 이른 것. 이렇게 해서 장지는 통영으로 하되 『토지』 관련 유품은 원주에 남는 것으로 정리된 것이다. 하지만 연내 착공을 앞둔 통영 박경리문학관 측은 “박 선생의 옷가지만 해도 여럿인데, 유족 등과 협의해 일부 나눠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감을 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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