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일요와이드>프로축구 황선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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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그것도 그냥 예전의 플레이를 되찾은 정도가 아니고 게임의 흐름을 읽는 눈까지 트인 「원숙의 경지」에 도달했다.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이러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을까.
건국대 재학시절 국가대표로 뽑혀 일찌감치 득점력을 인정받았던황선홍.프로 드래프트를 거부하고 독일행을 선택한 黃은 축구 본고장 진출이라는 스포트라이트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는 불행의 시작이었다.
독일 프로축구 2부리그 부퍼탈 팀에서 나름대로 활약했지만 무릎부상이라는 치명타를 입었다.거의 1년을 허송세월하던 黃은 93년 귀국했다.
당시 미국 월드컵 예선을 앞두고 있던 한국 축구는 黃의 귀국을 크게 환영했다.
그러나 93년 카타르에서 벌어진 아시아 최종예선전과 94미국월드컵 본선에서 황선홍은 실망만 안겨주었다.
무수한 찬스를 허공에 날려버린 황선홍은 「16강 진출실패의 주범」이라는 따가운 눈총속에「고개숙인 남자」가 돼버렸다.
부상의 공포.
그것은 끊임없이 그의 플레이를 위축시켰고,그때마다 쏟아지는 팬들의 질책은 그를 깊은 수렁속에 빠뜨렸다.
94시즌 14게임 5득점 3어시스트의 평범한 기록을 남겼다.
올시즌 전기리그에선 13게임에서 단 1골에 그쳤다.엎친데 덮친격으로 제1회 코리아컵에서는 「음주파동」에 휩싸여 심한 마음고생을 겪어야 했다.
이 때문에 한때 선수생활을 그만둘까도 생각했다.
새옹지마(塞翁之馬)랄까.
오히려 음주파동이 그를 분발시켰다.
「더이상 물러날데가 없다」는 오기가 생겼고 후기리그가 시작되자마자 잠자던 득점포가 가동되기 시작했다.해트트릭과 8게임 연속득점. 관중들의 환호가 터져나오고 어느새 자신감도 생겨났다.
최근 3게임에서 터진 득점은 모두 그림같은 논스톱 발리슛이었다. 『큰 욕심은 부리지않아요.마음이 편안하고 자신이 붙으니까게임이 잘 풀리네요.』 68년 7월14일 생으로 아직 한창때다.황선홍의 재기는 한국 축구의 희망으로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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