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창극칼럼] 올림픽 성화와 쇠고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지난주에는 두 개의 주요한 시위가 있었다. 중국 올림픽 성화 폭력 시위와 미국 쇠고기 수입 반대 시위다. 전자는 한국에 유학 온 중국 유학생들의 일탈 행위이고, 후자는 먹거리 불안과 관련된 내국인 시위다. 시위의 주체와 내용은 전혀 다르지만 우리를 둘러싼 강대국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국제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그만큼 우리는 좋든싫든 주변 강대국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중국 유학생들의 폭력 시위는 어쩌면 우리의 미래를 잠깐 엿볼 수 있게 해준 하나의 예표적인 사건이라고 말하고 싶다. 일견 이번 사건은 단순 사건으로 볼 수도 있다. 올림픽을 개최한다는 자부심으로 모인 중국 청년들의 순간적 감정이 만들어낸 자연발생적 사건이라는 것이다. 미루어 짐작컨대 우리나라에서 그들의 삶이 그렇게 편치는 않았을 것이고 한국의 시위문화를 눈으로 직접 보아 왔던 그들로서 “이 정도쯤은 우리도…”라는 식으로 폭력을 가볍게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진실은 단순함 속에 숨겨져 있는 법이다. 중국 청년들이 서울 한복판에서 붉은 오성기를 몸에 두르고 이런 식의 거친 행동을 하리라 누구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갑자기 커져서 다가온 중국의 실체를 서울에서 직접 체험하게 된 것이다.

이번 사건은 발생 자체보다 중국 정부의 대응 방식에서 중국의 실체를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남의 땅에서 불법 폭력 시위를 했다면 사과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도 처음에는 외교부 대변인이 “의도 자체가 선량했기 때문에…”라며 사과를 거부했다. 사건이 커지고서야 뒤늦게 외교부 부장이 유감 표시를 했다. 다른 나라의 법은 의도만 선량하면 지키지 않아도 괜찮은 걸까? 이런 생각을 갖고있는 이웃 나라로부터 우리가 앞으로 국가 대접을 받으며 살 수 있을까. 청나라의 힘 앞에 속수무책이던 남한산성의 조선 국왕의 무능을 보면서 가슴치던 일이 우리에게 다시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우리와 중국과의 관계에서 지난 몇십 년은 오히려 지극히 예외적인 기간이었다. 그 점에서 우리는 5000년 역사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을 맛보았는지 모르겠다. 이번 사건은 짧았던 좋은 시절이 끝나가고 있다는 메시지를 주는 것은 아닐까.

경고등이 켜졌는데도 보지 못하면 사고는 필연적으로 나게 되어 있다. 값싼 관광으로 중국을 겉핥기로 돌아보고 어깨를 으쓱거리던 시절은 이미 지났다. 중국은 인구면에서만 우리보다 30여 배나 큰 나라이며 그만큼 인재도 많은 나라다. 나라 간에는 서로 협력도 하지만 살기 위해 경쟁할 수밖에 없는 것도 현실이다. 이런 큰 나라와 경쟁을 하면서 살아 남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보통 사람 1명은 보통 사람 30명을 결코 이겨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평균적인 보통 인간을 길러내서는 중국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어렵다. 30명에 버금갈 수 있는 한 명의 뛰어난 인재를 길러내야 한다. 한 명의 천재가 수만 명을 먹여 살린다고 하지 않는가. 우리가 그런 인재를 길러낼 수 없다면 중국과의 경쟁은 이미 끝난 것이다. 우리에게 과연 그런 토양이 있는가. 울타리 안에서의 싸움에만 몰두하다가는 밖에서 몰려오는 더 큰 힘에 모두 함몰되고 마는 그런 우를 다시는 범하지 말아야 한다.

자기 힘이 부족할 때 친구의 도움을 받듯이 국가도 어려울 때를 위해 좋은 친구를 두어야 한다. 좋은 친구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며 번영을 위해 서로 도우며 사는 존재다. 국제 룰을 존중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런 것들이 지켜지면 중국도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번처럼 잘못을 하고도 사과조차 하지 않으려는 오만을 보일 때 약자 입장에서는 대응할 방법이 없다. 그런 일에 대비해 우리에겐 한·미동맹이라는 친구 관계가 있다. 지난 대선은 무너져 가는 한·미동맹을 복원시켜야 한다는 공감대의 결과였다.

그러나 그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미국 쇠고기 수입 반대 시위의 겉모습은 ‘국민 건강’을 내세우고 있다. 먹거리 문제라면 중국산 먹거리처럼 우리 식탁을 위협하는 것이 없을 텐데 왜 “광우병에 걸릴 위험이 제로 수준”이라는 미국산 쇠고기에 대해서만 이렇게 예민할까. 미순·효순 사건을 인도주의로 포장했듯이 이번은 국민 건강이라는 포장으로 반미를 부추기는 사람들이 있다. 그 점에서 정부의 대응은 유치하다. 문제의 본질은 반미의 전선이 본격적으로 다시 가동되고 있는 것인데 정부는 이를 ‘위생 문제’로 접근하니 아무리 끝장토론을 해도 먹히지 않는다.

올림픽 성화 시위와 쇠고기 시위는 별개가 아니라 상징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두 시위는 우리에게 어느 길을 선택할 것인가를 다시 묻고 있는 것이다.

문창극 주필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