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감싼 두 대비의 ‘시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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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불교가 비주류로 밀려나는 과정은 험난했다. 엄청난 제약을 받았다. 그중에 하나 특기할 만한 것이 풍속과 관련한 문제였다. 이를 잘 보여주는 시 한 수를 보자. “오성정(梧城正) 부인 정씨는 / 까까중과 사통하여 새끼 중을 낳았다네 / 장안의 화류객들에게 말하노니 / 어찌 왕래하여 인연을 맺지 않는가?” 조선 세조 때(1468) 종실의 부인이었던 정씨와 중들의 스캔들을 비꼰 시다. 오성정은 경녕군 아들 치다.

그가 일찍 죽자 부인 정씨가 남편 명복을 빈다며 불사(佛事)를 크게 베풀었고, 그 집에 중들이 무시로 드나들었다. 실록(實錄)은 정씨 부인이 설준·심명·해초 등 여러 중과 번갈아 사통했으며 임신하자 몰래 고향에 가 아이를 낳은 것이 두 번이라고 기록했다.

실록에는 이런 유의 기사가 자주 등장한다. 풍속 교화를 이유로 불교를 배척하는 의도가 엿보인다. 하지만 여자들이 중들과 친밀한 관계에 있었던 일 또한 사실이다. 이는 결국 "경국대전" 부녀상사(婦女上寺) 금지 조항으로 올라간다. 즉 ‘유생(儒生) 또는 부녀자들이 절에 가면 곤장 100대’라는 것이다. 유생이 함께 언급됐지만, 실제로 이들은 논외고 주 대상은 여자였다. 남자들은 빠르게 유교로 옮아간 반면 여자들은 더뎠기 때문이다.

왜 여자들은 계속 불교에 머물고자 했을까. 유교가 종교로서 그다지 매력이 없었다는 얘기일까. 하긴 유교는 내세(來世)도 없고, 또 복을 비는 일과도 잘 어울리지 않는다. 그에 비해 정치성만 강하다. 흔히 말하는 종교성이 떨어진다. 초기에 여자들은 유교에 경도될 이유가 별로 없었다.

성종 23년(1492) 두 대비전, 즉 인수대비와 인혜대비는 불교를 옹호하는 언문 교서를 왕에게 전달했다. 성종은 언문을 한문으로 번역해 신하들로 하여금 이 문제를 의논하게 했다. “무릇 새로운 법을 행하는 데는 반드시 기한을 세워 알지 못함이 없게 한 뒤에 행할 것입니다. 불법을 행한 것은 오늘날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니 한·당(漢·唐) 이후로 유교와 불교가 아울러 행해졌습니다. 역대 제왕(帝王)이 어찌 불교를 배척하려고 하지 않았겠습니까마는 이제까지 근절시키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반드시 인심의 요동을 중히 여겨 각각 그 삶을 편히 하도록 한 것입니다.”

대비들은 인심의 동요를 문제 삼았다. 불교가 사람들의 마음에 위안을 준다는 얘기다. 이 말에 동의하는 신하들은 제법 있었지만 대다수 신하는 역시 ‘유교로의 전환’을 되돌릴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성종은 여러 날 고민한 끝에 결국 어머니를 설득하는 쪽으로 결론을 냈다. 두 대비의 시위는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불교가 조선에서 살아남는 데 일조했다. 거리에서 ‘부처님 오신 날’ 등촉을 볼 수 있는 게 얼마간 조선 여자들의 공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이순구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