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복판서 폭력시위 잠재된 중국 경계심 자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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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정부 들어 미묘하게 변화하던 한국·중국·북한의 동북아 삼각 관계가 성화봉송 폭력 사태로 수면 위로 노출되고 있다. 지난 5년 진보정권 때의 동북아 지형도는 멀어진 한·미, 다가섰던 한·중, 소원했던 북·중으로 요약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새 정부 들어 복원되는 한·미, 미묘해진 한·중, 중국에 매달리는 북한의 세 축으로 바뀌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지난달 27일 서울에서 벌어졌던 성화봉송 폭력 사태는 이런 기류를 한꺼번에 드러내준 계기가 됐다.

◇2002년엔 반미, 이번엔 반중 정서=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정권이 선택된 배경의 하나는 반미 정서였다. 주한미군 장갑차에 치인 여중생 사망 사건에 민심은 대규모 촛불집회로 반응했다. 그 5년 뒤 보수 정권을 택한 국민 정서는 이번엔 성화봉송 폭력 사태에 반중 감정으로 반응했다.

전문가들은 5년 전이나 지금이나 ‘자존심의 상처’를 원인으로 들지만 이번엔 지난 정부의 대중 자세에 대한 불만이 깔려 있다고 지적한다. 윤덕민 외교안보연구원 교수는 1일 “그때나 최근이나 민족주의적 감정의 표출이라는 점은 같지만 이번 사태엔 지난 정부가 대중 관계에서 저자세를 보였던 데 대해 잠재했던 불만이 한꺼번에 표출됐다”고 분석했다. 박홍석 동아대 교수도 “그동안 중국 눈치를 너무 많이 봤다고 여겼던 정서가 서울 한복판에서 나부끼는 오성홍기에 폭발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지난 정부가 대중 관계를 강화하며 동북공정 등에 미온적 태도를 보였던 데 대한 반작용이라는 설명이다.

◇미묘해진 한·중=민심에 놀란 새 정부는 성화봉송 폭력 사태에 엄정한 법적 대응을 밝혔다. 지난달 30일 중국 유학생에 대한 비자 발급 심사를 강화하겠다고 발표한 데 이어 1일엔 폭력시위에 참가한 유학생 1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중국 정부는 공식적으론 폭력 사태에 대한 유감을 표명했다. 그러나 “중국 측이 한국 언론이 거리에 나왔던 중국인 전체를 시위대로 표현한 데 대해 불편해했다”며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이들은 성화봉송을 축하하러 나온 사람들임을 강조했다”는 게 정부 관계자의 설명이다. 중국 역시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의미다.

이런 민감한 상황은 향후 ‘한·미 전략동맹’의 구체화 과정에서 다시 벌어질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주장환 동서대 교수는 “미국이 주도하는 미사일방어(MD) 체제에 한국이 참여할 경우 중국은 극히 민감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중국에 매달리는 북한=한·미 동맹 강화와 한·미·일 삼각동맹 복원 조짐에 북한은 중국을 탈출구로 선택했다. 지난달 28일 평양에서 열린 성화봉송에는 40만 명이 동원됐다. 명목상 국가수반인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내각 수장인 김영일 총리까지 참석했다. 조선신보는 “시민들은 꽃다발을 열광적으로 흔들고 ‘조·중 친선’ 구호를 외쳤다”고 전했다. 지난해 10월 남북 정상회담에서 중국을 제외할 수도 있는 ‘3자’ 또는 ‘4자’ 종전선언 정상회담을 합의했던 북한의 태도가 돌변한 국면이다.

전문가들은 그러나 성화봉송 사태가 한반도의 지형도 변화에 악재로 작용해선 안 되며, 한·미 동맹 복원과 한·중 관계 확대는 동시에 진행돼야 한다고 거듭 강조한다. 최영종 가톨릭대 교수는 “반미에 기댔던 게 좌파 포퓰리즘이라면 우리 사회가 반중 정서에 자극받아 우파 포퓰리즘으로 흐르는 과오를 반복해선 안 된다”고 조언했다.

채병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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