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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희망 이야기] 노인 점심 챙기는 '국밥 시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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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 권경업씨가 부산진구 초읍동 어린이대공원 무료급식소에서 노인들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있다. [송봉근 기자]

부산 초읍동 어린이대공원 정문 부근 가건물에는 매일 오전 11시쯤 노인들이 삼삼오오 모여든다. 노인들이 100여명으로 불어날 무렵 가건물 문이 열리고 김이 무럭무럭 오르는 국밥 솥이 나타난다. 이어 '산악 시인' 권경업(權景業.52)씨와 7~8명의 자원봉사자가 노인들에게 점심을 차려준다.

權씨는 1989년 4월 대공원에 약수를 받으러 갔다가 많은 노인이 점심을 굶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무료급식에 나섰다. 당시 權씨는 본격 시작(詩作) 활동에 나서면서 생계를 꾸리기 위해 국숫집을 열었던 터여서 당장 다음날부터 길바닥에 솥을 걸고 국수를 끓여 대접했다.

소문이 나면서 급식소를 찾는 노인이 늘어났다. 당초 50그릇으로 충분했던 국수가 한달 뒤 100그릇으로도 부족했다. 일손도 너무 달렸다. 그래서 손이 많이 가는 국수 대신 라면으로 메뉴를 바꿨고, 국밥집을 개점한 요즘은 국밥을 대접한다. 처음에는 공원 구석 맨땅에서 급식을 했으나 93년 부산시의 도움으로 가건물을 얻었다.그러나 무료 급식은 중단될 뻔한 위기를 맞기도 했다.

7년 전 부산 지하철 2호선 공사가 시작되자 공사장 주변은 유동인구가 크게 줄었다. 사상터미널에 있던 權씨의 국숫집도 타격을 받아 문을 닫으면서 하루 10만원 가량의 급식 비용을 마련하기 어려웠다.

"며칠 밤을 뜬 눈으로 고민했지요. 그러나 옹기종기 급식을 기다리는 어른들 모습이 아른거려 도저히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

마음을 다진 그는 부인(50.당시 교사)에게 동의를 얻어 빚을 내 급식 비용을 마련했다. 주변 사람들도 '아름다운 사람들'이란 후원회를 결성해 돕기 시작했다. 요즘도 100여 회원들은 매달 3000~1만원씩 보내오고 있다. 새로 개점한 權씨의 국밥집도 자리가 잡혀 지금은 어려움이 없다.

"살기 어려운 탓인지 공원을 찾는 노인들이 점점 늘고 있습니다. 이 분들이 배를 곯지 않고 한나절을 보낼 수 있도록 급식을 계속할 겁니다. "

權씨는 20평 남짓한 급식소를 약간 넓히고 북구 구포에도 무료급식소를 열 계획이다. 權씨는 77년 국내 최초로 설악산 토왕성 빙벽을 등반해 산악 역사를 새로 썼다. 82년엔 부산 학생 산악연맹을 이끌고 히말라야 파빌봉 등반에 성공했다. 90년엔 백두대간 남녘 1600㎞를 석달 가까이 종주하며 연작시를 잡지에 연재하면서 '산악 시인'이란 별명을 얻었다. 요즘은 노인들에게 '국밥 시인'으로도 불린다.

부산=김관종 기자<istorkim@joongang.co.kr>
사진=송봉근 기자 <bks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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