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념인생] '현대版 허준' 성환길 박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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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환길 박사가 지리산 자락에서 산수유 꽃을 살펴보고 있다. [송봉근 기자]

▶ 산자고(종양 등에 효능).

▶ 복수초 (이뇨 등 효과).

한 평생 한 길을 가는 사람의 모습은 아름답다. 특히 새로운 분야의 지평을 여는 사람의 삶은 숭고하기조차 하다. 남들이 거들떠 보지 않는 길을 개척하며 고난을 극복하는 모습은 감동을 주기도 한다. 한 평생 외길 인생을 사는 사람들의 일에 대한 열정과 투철한 삶의 발자취를 더듬어 본다.

경남생약연구소 성환길(成煥吉.64.진주시 대안동 중앙약국 대표 약사)소장을 아는 사람들은 그가 허준(許浚.1546~1615)선생을 닮았다고 말한다.

겉모습이 비슷해서가 아니다. 지리산 약초를 캐 환자를 치료하는 점이 같기 때문이다.

그는 허준 선생이 약초를 캐러 지리산을 누빈 발자취를 4백여년이 지난 요즘 뒤따르고 있다. 주말마다 지리산을 이 잡듯이 뒤진 지 벌써 40년이나 됐다. 그의 머리 속엔 지리산의 계곡과 능선이 상세하게 입력돼 있다.

길을 보지 않고 숲만 쳐다보고 걷다가 낭떠러지로 떨어져 4개월간 누워 지냈을 때 외에 주말 산행을 거의 거른적 없다. 가까운 친척 결혼식에 가지 않아 오해를 산적도 많았다.

벌에 쏘이고 독사에 놀라기는 다반사였다.길을 잃고 밤새 헤맨 적도 한두번이 아니다.

이렇게 해서 지리산에서 그가 직접 확인한 약용식물은 975종. 모두 위치를 확인하고 사진까지 찍어 학계에 보고했다.

그가 찾아낸 지리산 약용식물 중에는 멸종위기의 희귀종도 많다. 1993년 중산리 계곡서 찾아낸 '흰칡'은 당시 학계도 놀랄 정도였다. 보통 칡은 자색 계통의 꽃이 피지만 흰꽃이 피는 칡은 처음 보고됐기 때문이다.

그는 약초 꽃 하나를 찍기 위해 4~5년 동안 같은 장소를 찾기도 했다. 고산지대의 개화 시기를 맞추기 위해 해마다 시기를 달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리산을 다녀온 날엔 반드시 산행일지를 쓰고 있다. 약용식물 위치를 정확히 기록한다. 올해 못찍었던 사진을 내년엔 꼭 찍기 위해서다.

"지리산 약용식물이 멸종위기에 있습니다.과거에는 약초꾼들이 마구잡이로 캤지만 지금은 울창한 산림이 약용식물의 탄소동화작용을 방해, 성장에 문제가 생기고 있습니다."

지리산 식물을 연구하는 학자는 국내외에 더러 있지만 약용식물만 연구하는 약학자는 그가 유일하다.

그는 골담초에 있는 식물 호르몬 일종인 피토스테롤이 신경통.관절염에 효과가 있고, 지리바꽃의 아코니틴이 중풍.반신불수 등를 치료하는 성분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그가 지리산 주변 농촌과 산골에서 수집한 민간처방의 효과 성분을 찾아낸 것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그가 지리산 약용식물에 관심을 가진 것은 부산대 약대를 졸업하고 1964년 진주서 개업하면서부터다. 그의 약국에는 신경통.관절염을 앓는 노인 환자들이 많이 찾아왔다.

양약처방으로 치료에 한계를 느낀 그는 민간처방으로 눈을 돌렸다.

골담초로 술을 만들어 먹은 신경통 환자들이 나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지리산에서 캔 골담초로 즙을 만들어 환자들에게 마시게 했다.

상당한 효과를 확인한 그는 주말마다 배낭에 카메라와 수첩을 넣고 지리산으로 달려갔다.

약초를 공부하기 위해 70년 중앙대 대학원에 등록한 그는 77년 '골담초의 약효성분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으로 '개업약사 1호' 약학박사가 될때까지 지리산 약초의 약리작용만 연구했다. 약리작용 연구 결과에 자신감을 얻은 그는 77년 경남생약연구소를 세워 생약치료제 개발에 매달렸다. 2000년 중앙대 약대 황완균 교수팀과 상황버섯과 약초인 '시호'를 섞은 즙이 항암효과를 13% 높인다 사실을 밝혀냈다. 골담초로 신경통.관절염 치료약도 개발했다. 요즘은 '하수오'뿌리 추출액으로 강장제를 연구하고 있다.

최근 '질병을 치료하는 약용식물의 효능과 재배법'(공저)을 낸 그는 약용식물 재배 기술 연구와 약용식물 보급에도 앞장서고 있다.

96년 진주 근처에 6천여평의 약용식물 농장을 조성해 재배법을 실험하고 있다

그가 펴낸 책만 '약이 되는 풀과 나무'등 9권이나 된다.

내년엔 그동안 연구를 집대성한 '지리산 약용식물 도감'을 펴낼 예정이다.

4년전 인터넷과 디지털 카메라 사용법을 배우는 등 그의 연구열을 식을 줄 모른다.

"넓고 높은 지리산에 자생하는 약용식물만 제대로 활용하면 부작용 없이 숱한 질병을 치료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인공 재배법이 보급돼 멸종위기의 약초를 보호하고 저질 중국산 약초를 밀어 내야 합니다."

김상진 기자

*** 지리산엔 이런 약초들이 …

성환길 소장이 40여년간 찾아 낸 지리산 약용식물은 모두 975종. 이 중 분포도가 넓은 식물은 해열.두통에 효과 있는 지리강활 등 32종. 나머지는 군락지가 적어 머지 않아 멸종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성 소장은 보고있다.

지리산에만 있는 약용식물은 지리산 고사리.참바위치 등 31종. 성 소장은 개불알꽃.홀아비 꽃대 등 29종은 보호받지 못하면 멸종될 것으로 전망했다.

희귀종으로는 산마늘.쥐방울 등 16종.암치료용으로는 바위솔.짚신나무.바위손 등 31종을 제시했다.

그는 975종 약용식물을 고혈압(22종).당뇨병(16종).간장질환(34종).근골격계(38종).위장질환(24종).심장질환(14종)등 치료 목적에 맞게 구분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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