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운했던 천재 스프린터 헌정영화 ‘더 원’으로 부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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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호 16면

1932년. 23세의 중국 청년이 태평양을 건넌다. 청년의 이름은 류창춘. 그는 중국 최고의 육상 단거리 선수로서 조국을 대표해 LA올림픽에 참가하러 가는 길이었다. 여행은 고통스러웠다. 미국까지 가는 데 무려 3주가 걸렸다. 그러나 류창춘이 뱃길 위에서 보낸 시간은 그가 LA로 가기 위해 참고 기다려야 했던 시간에 비하면 아주 짧았다.

76년 전 LA올림픽의 유일한 중국 선수 류장춘

육체적인 고통은 류창춘이 묵묵히 참고 견뎌내야 했던 굴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1909년 랴오닝성에서 태어난 류창춘은 29년 선양에서 열린 제14회 화베이운동대회에서 100m·200m와 400m 등 단거리 3개 종목에서 중국 최고기록을 세웠다. 100m 기록은 10초8. 28년 암스테르담올림픽 남자 100m에서 우승한 퍼시 윌리엄스(캐나다)의 기록과 같았다. 그의 주법은 칼 루이스와 흡사했다.

보폭을 넓게 잡는 롱 스트라이드(Long Stride) 주법으로 맨 흙 트랙을 날듯이 달렸다. 홀연히 나타난 천재 스프린터를 제국주의 일본이 눈여겨봤다. 32년 만주국을 세운 일본은 류창춘을 만주국 대표로 올림픽에 내보내려 했다. 만주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확인하려는 정치적인 술수였다. 류창춘은 단호히 거부한다. 그의 기백에 군벌 장쉐량이 감동했다. 류창춘은 장쉐량이 준 1600달러를 들고 7월 8일 미국을 향해 출발한다.

한 일본기자가 류창춘에게 “만주국 대표로 올림픽에 나가는가” 하고 물었다. 류창춘은 “나는 중국 대표”라고 말했다. 일본체육협회에서 “만주국 선수의 무운을 빈다”는 전문을 보내자 류창춘은 “만주국 대표는 없다. 오직 중국 대표뿐”이라며 분노했다. 21일 만인 7월 29일 미국에 도착한 류창춘은 3일 뒤 100m 조별 예선에 출전한다.

11초1로 5위에 그쳐 탈락. 200m에서 22초1을 찍었으나 조 4위로 또 탈락했다. 유일한 중국인 선수의 도전은 그렇게 끝났다. 여비가 바닥난 류창춘은 화교들이 조금씩 모아준 돈으로 가까스로 귀국했다.

류창춘의 전성기는 계속됐다. 33년 난징에서 열린 제5회 전국운동회에 랴오닝성 대표팀의 기를 들고 입장한 류창춘은 100m 10초7, 200m 22초00을 기록해 두 종목에서 중국 최고기록을 세우며 2관왕에 올랐다. 그가 세운 100m 최고기록은 25년이 지난 58년에야 군인 선수 량건훈에 의해 깨진다.

30년대에 현대의 주법을 마스터한 류창춘의 경기력은 그만큼 뛰어났다. 류창춘은 38년 3월 은퇴한 다음 교육자로 여생을 살았다. 베이징사범대학 강사, 선양중정대학 강사, 베이징동대체육학부 부교수, 창춘사범대학 부교수, 다롄공학원(현 다롄이공대학) 교수로 일했다. 83년 3월 21일 류창춘은 74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류창춘이 죽은 지 25년이 지났다. 중국의 영화감독 허우용은 76년 전의 외로웠지만 위대한 영혼을 위해 영화 한 편을 헌정한다. ‘더 원(The one)’. 중국 제목은 ‘한 사람의 올림픽(一個人的奧林匹克)’이다.

베이징올림픽을 기념하는 이 영화는 류창춘을 소재로 삼았다. 생전의 류창춘은 언젠가 중국이 올림픽을 개최하게 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중국환경과학연구아카데미에서 일하는 류창춘의 아들 훙량은 영화 제작발표회에서 “아버지는 우리에게 낙관주의와 애국심을 심어주었다”고 말했다.

염원했던 올림픽 유치에 성공하면서 중국인은 시련의 시대를 살다 간 육상 영웅을 향해 절절한 감정을 느끼는 것 같다. 베이징올림픽 헌정영화에 류창춘이 등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청룽(成龍)과 장쯔이(章子怡), 왕리훙, 스테파니 선 등 네 명의 중국인이 5월에 개봉할 예정인 이 영화의 주제가를 부른다. 장쯔이는 중국 본토, 청룽은 홍콩, 왕리훙은 대만, 싱가포르 배우 스테파니 선은 해외에 두루 퍼진 화교들을 대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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