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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억의 우상, 야오밍..그가 바로 중국이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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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호 16면

베이징올림픽의 상징이며 베이징시의 명물로 남게 될 ‘새둥지’ 올림픽 메인스타디움. 마무리 공사가 한창이다. 베이징 로이터=연합뉴스

야오밍(姚明)에게 농구공이 처음 생긴 건 네 살 때였다. 9월 12일 생일선물이었다. 1984년 LA올림픽이 폐막된 지 한 달밖에 안 돼 올림픽 열기가 아직도 가시지 않은 시점이었다. LA에서 개최된 올림픽은 중국과 인연이 깊었다.

32년 LA올림픽은 중국이 사상 최초로 참가한 올림픽이었으며, 84년 LA올림픽은 중국 공산화 이후 처음 참가한 대회였다. 84년 올림픽에서 중국은 금 15, 은 8, 동 9개로 종합 4위를 차지했다. 괜찮은 성적이었다. 소련과 동유럽이 불참하긴 했지만 32년 올림픽에서 노 메달에 그쳤던 것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2년 뒤 야오밍은 상하이를 방문한 미국프로농구팀을 통해 처음 NBA라는 것을 알게 됐다.

야오밍과 농구공의 인연은 그러나 유쾌하게 시작되진 않았다. 초등학교 1학년 운동회 때였다. “자 여러분, 농구공 넣기 대회에 누가 나가면 좋을까요.” 선생님의 말씀이 떨어지자 학급 친구들이 모두 야오밍을 쳐다봤다. 다들 야오밍의 부모가 농구선수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야오즈위안은 2m8㎝, 어머니 팡펑디는 1m88㎝로 모두 유명 선수였다.

농구공을 손에 든 야오밍의 가슴은 뛰었다. 힘껏 공을 던졌지만 그물을 벗어났다. 그의 얼굴은 부끄러움으로 빨갛게 물들었다. 그가 생애 처음으로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던진 공은 실패였던 것이다. 야오밍이 어릴 적부터 농구를 좋아했던 건 아니다. 책을 좋아했고, 게임에 탐닉하기도 했다. 부모도 야오밍이 농구를 하기보다 열심히 공부해 대학에 진학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88년 서울올림픽 개최 이후 야오밍은 숙명적으로 농구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서울올림픽은 중국엔 실패였다. 445명의 대규모 선수단을 파견했지만 금메달 다섯 개에 그치며 8위로 밀려났다.

9세 때 이미 1m70㎝가 된 야오밍은 상하이 쉬후이(徐匯)구의 소년체육학교에서 정식으로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부모도 체육학교가 오히려 대학 진학에 유리하다는 점을 알게 되면서 든든한 후원자가 됐다. 14세 때 야오밍은 상하이 청년팀에 진출했다. 그사이 중국은 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금 16, 은 22, 동 16개로 다시 4위를 차지했다.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선 프로 선수들의 참가가 두드러졌는데 마이클 조던, 매직 존슨 등으로 구성된 미국 남자 농구팀이 가볍게 금메달을 따냈다. 그 팀은 ‘드림팀(Dream Team)’으로 불렸다. 야오밍의 꿈도 커졌다.

96년 미국 애틀랜타에서 열린 올림픽은 근대 올림픽 개최 100주년을 기념하는 대회였다. 전 세계 197개 국가·지역에서 모두 1만788명이 참가해 대성황을 이뤘다. 495명의 선수단을 파견한 중국은 금 16, 은 22, 동 12개로 4년 전과 비슷한 메달 수를 따냈고, 성적도 지난 대회와 같은 종합 4위를 차지했다.

야오밍은 이듬해 중국 청소년대표팀에 선발됐다. 농구에 대한 열정도 커졌지만 이 당시 야오밍의 가슴에 더 큰 불을 지핀 건 자신보다 한 살 어린 예리(葉莉)였다. 그 역시 농구선수로, 상하이 농구팀의 주전 선수였다. 데이트를 신청했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기 일쑤였다.

야오밍과 예리 모두 중국 남녀 대표팀으로 선발된 시드니올림픽은 사실 중국엔 아픈 기억이 담긴 대회였다. 중국은 93년 당시 2000년 올림픽 개최권을 따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21세기 새 시대를 여는 2000년 올림픽을 유치함으로써 공산 통치 50여 년의 고립에서 벗어나 세계의 강국으로 거듭나기를 희망했던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희망은 그저 희망에 그치고 말았다. 하지만 정작 시드니올림픽이 개최됐을 때 중국이나 야오밍에겐 모두 좋은 결과가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이 대회에서 중국은 금 28, 은 16, 동 15개로 처음으로 미국·소련에 이어 세계 스포츠 3강에 올랐다. 야오밍은 개인적으로 큰 성과를 챙겼다. 올림픽에서 모은 200개의 각국 휘장 중 가장 예쁘다고 생각되는 휘장 50개를 모아 예리에게 생일선물로 주었는데 이게 예리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중국으로 돌아온 야오밍은 밸런타인 데이에 예리와 함께 서로 연인임을 표시하는 붉은 끈을 나눠 가졌다. 중국의 습속에 따라 남자인 야오밍은 왼쪽 손목에, 예리는 오른쪽 손목에 붉은 끈을 맸다.

키 2m26㎝, 몸무게 140㎏의 거구로 성장한 야오밍은 2002년 꿈에 그리던 NBA 진출에 성공했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거대를 지향하는 DNA를 가진 미국인에게 덩치 큰 야오밍은 스카우트 1호 대상이었다. 2002년 NBA 드래프트 전체 1순위로 뽑혔던 야오밍은 휴스턴 로케츠의 센터로 발탁됐다. 2003~2004 시즌에서 야오밍은 단 두 경기만 빼고 모두 출장하는 기염을 토하며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다. ‘걸어 다니는 만리장성’이란 별명도 붙었다.

그가 몰고 다니는 NBA 중계방송 시청자 수만 2억200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미국 경제지 포보스에 따르면 그의 1년 수입은 무려 2630만 달러에 달한다. 중국 남자 선수로는 세 번째로 NBA에 진출했지만 그만큼 성공한 중국 남자 농구 스타는 없었다. 야오밍은 13억 중국인의 우상이 된 것이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 그가 중국 대표팀의 기수를 맡은 건 당연했다.

20년 동안 중국은 남자농구팀의 선수가 기수를 맡아왔다. 이번에 야오밍이 그 영광을 차지한다는 데 대해 아무도 토를 달지 않았다. 야오밍은 참가국 기수 중 가장 키가 큰 선수였다. 그는 중국 남자농구가 이번에도 “올림픽 8강에 들지 못하면 1년 동안 수염을 깎지 않겠다”는 출사표를 던졌다. 24세의 당당한 청년 야오밍은 이제 자신이 중국의 부상을 대표하는 인물임을 알고 있었다.

중국 남자농구는 8강 진출에 성공했고, 중국은 금 32, 은 17, 동 14개로 미국에 이어 종합 2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1위인 미국과는 금메달 수에서 겨우 3개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야오밍은 아테네올림픽 폐막식에 예리와 손을 잡고 나타났다. 연인 사이임을 만천하에 공개한 것이다. 둘은 2008 베이징올림픽 개막을 정확히 1년 앞둔 지난해 8월 결혼에 골인했다. 1m90㎝의 예리는 결혼 후 미국의 야오밍 집으로 날아가 현재 휴스턴대에서 회계학을 공부 중이다. 야오밍은 리복·코카콜라·비자카드·맥도널드·애플 등과 연간 1000만 달러 이상의 후원 계약을 하고 있다.

야오밍은 또 2005년 2월 휴스턴에 ‘야오 레스토랑’을 열었다. 어머니 팡펑디의 상하이 요리 솜씨가 소문을 타면서 아예 중국 식당을 낸 것이다. 아버지 부시 대통령도 자주 들러 식사하는 명소가 됐다.

야오밍은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도 중국 대표팀의 기수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야오밍은 중국인의 우상이기 때문이다. 중국 언론은 야오밍이 중국의 우상으로 꼽히는 10대 특징을 거론했다. ‘장대한 기골, 선량, 정직, 유머, 용기, 투지, 재부(財富), 농구 실력, 책임감, 애국심’이 바로 그것이다. 마지막 덕목인 강한 애국심은 야오밍을 다른 스포츠 스타들과 차별화하는 요소다.

NBA에서 뛰다가 중국에 온 야오밍에게 한 기자가 물었다. “언제 미국으로 돌아갈 것이냐?”고. 그러자 야오밍은 “내게 있어서 돌아가는 곳은 중국이지 미국이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 또 미국 언론이 야오밍에게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그는 주저하지 않고 “마오쩌둥 주석과 저우언라이·덩샤오핑”이라고 답했다.
중국의 옛 영화 회복을 알리는 신호탄이 될 베이징올림픽 개막식에서 중국을 대표할 상징적 인물로 그만한 사람이 있을까.

특히 베이징에선 중국이 미국을 제치고 세계 1위로 올라설 공산이 크다. 영국올림픽위원회는 중국이 전체 302개의 금메달 중 48개를 따내 미국(37개)과 러시아(32개)를 따돌리고 사상 처음 종합 1위를 차지할 것으로 전망한다. 개최국 이점도 크다. 64년 도쿄올림픽에선 일본이 종합 3위(금메달 16개), 88년 서울올림픽에선 한국이 12개의 금메달로 세계 4위를 차지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2월 말 야오밍은 왼쪽 발목을 다쳤다. 수술과 재활까지 16주가 예상되는 중상이다. 언론들은 중국이 대기오염과 식품위생·인권문제에 이어 야오밍 부상이라는 제4의 난관에 봉착했다고 전했다. 13억 중국이 슬퍼할 정도였다. 그러나 올림픽은 언제나 야오밍의 편이었다. 7월 초 코트에 복귀할 것으로 전망된다. 그리고 그가 희망하는 중국팀 기수가 될 것이다.

중국이 올림픽 참가 초청을 처음 받은 것은 1896년 제1회 아테네올림픽 개최 당시였다. IOC는 중국 주재 프랑스대사관을 통해 청나라 조정에 올림픽 참가 초청장을 보냈다. 그러나 내우외환에 처한 청은 스포츠 행사에 관심을 쏟을 여유가 없어 거절했다. 이후 중국에서 올림픽을 유치하자는 주장이 처음 제기된 건 100년 전인 1908년이었다. 톈진에서 발행되던 청년보 사설을 통해서였다.

중국인이 베이징올림픽을 ‘100년 만의 꿈’으로 부르는 이유다. 그러나 중국인에게 베이징올림픽 1위는 100년 만의 꿈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1840년 아편전쟁 이후 서방 열강의 침탈로 반식민지 상태로까지 빠져드는 참담함을 맛봤던 중국이 168년 만에 ‘부흥의 길’로 들어서는 출발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야오밍은 바로 그러한 꿈과 출발점의 한복판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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