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허영의 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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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요즘 새봄을 맞아 수많은 작은 새싹들이 살포시 소리도 없이 쫑긋쫑긋 땅에서, 나무 등걸에서 매일 돋아 나온다. 매년 보는 모습이지만 볼 때마다 신기하고 예쁘다.

이 아름다운 계절에 별로 아름답지 못한 총선이 그런대로 무사히 끝나고 재미있는 결과들도 낳았다. 자기는 떨어질 줄도 모르고 마치 자기 세상인 양 공천을 좌지우지하던 분들은 정치의 허망함과 민심의 힘을 실감했을 것이다.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들은 공무원만이 아니라 법조인이나 교수들 중에도 영혼이 없는 사람들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직업에 상관없이 누구나 권력 앞에서는 영혼을 갖기 힘든 모양이다.

선거는 부와 권세를 놓고 벌이는 한판의 신명 난 굿판이다. 근대 경제학의 아버지인 애덤 스미스는 부와 권세를 원하는 마음을 허영이라고 보았다. 스미스는 원래 도덕철학 교수였다. 18세기 후반 당시 영국에서 도덕철학은 신학·윤리학·법학 및 경제학을 모두 포함한 종합 인문사회과학이었고, 스미스의 글에는 경제학만이 아니라 인간과 사회 전반에 관한 많은 지혜가 담겨 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이 가장 원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존경과 부러움을 받는 것이고, 가장 싫어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무시와 경멸을 당하는 것이다. 어리석은 인간들은 지혜와 덕이 아니라 부와 권세를 가진 사람을 존경하고 부러워하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업신여기기 때문에 사람들은 부와 권세를 얻으려는 허영에 빠진다. 이러한 허영은 한편으로는 ‘모든 강탈과 부정의 원인’이 되지만, 또한 ‘인류를 고무시켜서 땅을 경작하게 하고, 집을 짓게 하고, 도시와 국가를 건설하게 하고, 과학과 기술을 발명하고 개량하게 하였다’.

이런 인간의 허영이 어떤 때에 강탈과 부정이라는 악을 낳고, 어떤 때에 사회발전이라는 선을 낳는가? 여기에 대한 스미스의 대답은 자기사랑과 탐욕(이기심)의 구분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흔히 스미스는 이기심을 경제발전의 동력으로 보았다고 말하는데 이는 부정확한 말이다. 스미스는 자기사랑과 이기심을 구분하고, 이기심이 아니라 자기사랑이 경제발전의 동력이라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자기사랑은 남에게 부당한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에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며, 반면에 이기심은 남에게 부당한 피해를 주면서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는 무분별한 탐욕을 말한다. 스미스는 자기사랑은 종족보존과 개체보존을 위해 당연하다고 보았다. 나쁜 것은 자기 이익을 위해 남에게 부당한 피해를 주는 것을 개의치 않는 이기심 내지 탐욕이다. 남에게 부당한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부와 권세를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당연한 본성이자 동시에 인간사회를 개선해 온 동력이라는 스미스의 통찰은 보편타당성을 갖는다고 생각된다. 확실히 인간은 천사가 아니고 자기중심적인 존재다. 이런 면에서 자본주의는 인간의 본성과 잘 부합한다. 그 덕분에 자본주의 경제는 경제는 물론이고 정치와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인간사회를 그 이전과 비교가 안 되게 발전시켜 온 놀라운 힘을 발휘했다.

그러나 자기사랑만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인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기심은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자기사랑은 자연이 심어준 감정이며, 괜히 주어진 것이 아니다. 이기심은 단순한 자기사랑이 아니라 수전노의 돈에 대한 사랑처럼 지나친 자기사랑이다. 모든 사람이 혹은 거의 모든 사람이 어느 정도 돈과 다른 재산을 사랑한다. 나아가 친구나 손님이나 동료에게 친절이나 봉사를 제공하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가장 큰 기쁨인데, 이는 자기 재산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고전에 밝았던 스미스는 아마도 이 구절을 읽었을 것이다. 이기심과 자기사랑에 대한 구분이 스미스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자기사랑 덕분에 재산을 모을 수 있고 재산 덕분에 인생의 가장 큰 낙을 누릴 수 있다고 본 점도 똑같다. 그러나 인생의 가장 큰 낙이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 스미스는 그것이 다른 사람의 부러움을 받는 것이라고 보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웃과 친지를 대접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스미스가 보여준 것은 보통사람들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보여준 것은 보통사람들이 따라 하기 힘든 철인의 경지이긴 하지만 누구나 본받기 위해 노력할 만한 모습인 것 같다.

이근식 서울시립대 경제학부, 경실련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