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이 삼촌의 꽃따라기] 얼레지, 양갓집 규수가 바람났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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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얼레지

봄이 유난히 더디다 싶었는데 연둣빛 산자락이 벌써 진초록으로 바뀌고 있다. 그 바람에 ‘꽃쟁이’들은 어디로 가야 할지 마음도 발도 바쁘다. 미치광이풀과 모데미풀이 지난해 못잖게 일찍 피더니 나무들조차 앞다투어 나 여기 있소 한다. 나뭇잎이 자라 숲에 그늘이 드리우기 전에 조금이라도 햇살을 더 받으려 풀꽃들은 여간 부산한 게 아니다.

얼마 전에 찍은 꽃술 노란 깽깽이풀이 바로 다음 날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가 찍은 사진이 영정사진이 된 셈이다. 그 얄미운 ‘삽쟁이’들의 손목이 호미 자루처럼 홱 돌아갔으면 싶다. 캐고 싶어도 맘껏 캘 수 없는 꽃은 없을까 하고 생각해 보니 요즘 한창인 얼레지가 떠오른다.

백합과인 얼레지는 비늘줄기가 대개 20㎝ 깊이에 박혀 있기 때문에 캐내려는 사람들 손에는 기껏해야 똑 부러진 꽃줄기나 잎만 쥐여진다. 그렇게 꽃이나 잎은 떼어줘도 비늘줄기만 살아 있으면 다음 해에 다시 활짝 웃으며 핀다. 스스로 터득한 게 아니라면 도마뱀이 가르쳐줬을 것이다.

얼레지는 잎에 어루러기 같은 무늬가 있어서 붙은 이름이다. 그 보랏빛 고운 자태 앞에 얼마나 많은 이가 무릎을 꿇고 얼마나 많은 필름과 메모리를 갖다 바쳤을까.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는 얼레지는 그래서 더욱 도도하고 아름답다. 햇볕을 받아 꽃잎이 뒤로 활짝 젖혀지면 바람난 양갓집 규수가 연상되기도 한다. 두 폭 치마 펼치고 얌전히 앉아있지만 부는 바람에 들썩이는 마음 애써 진정시키는 여인네. 한두 송이 핀 것보다 무리 지어 피는 모습이 아름다워 역광에 비친 얼레지 군락을 처음 만난 사람은 황홀경에 빠진다.

얼레지는 유독성 식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못 먹을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니다. 물에 담가 독을 우려내고 나물로 만들어 비빔밥에 넣어 먹으면 그 맛이 곤드레나물밥 못지않은 별미다.

나는 얼레지 특유의 쌉싸래한 맛을 좋아해서 가끔 생잎을 한 장 뜯어 먹곤 한다. 뜯을 때에는 꼭 두 장 나온 잎 중 한 장만을 맛본다. 그러지 않고 한 장일 때 뜯거나 두 장 다 뜯게 되면 광합성을 제대로 하지 못해 꽃을 피우기 어렵다. 얼레지가 유독성 식물이라는 사실은 나의 장에서 보장한다. 몇 장 더 먹게 되면 즉시 죽을 만들어 ‘정화조’로 내보내니 말이다. 내 몸을 이용한 임상시험 결과는 선거 출구조사보다 신뢰도가 높다.

엘레지의 여왕이 이미자라면 얼레지의 여왕은 흰얼레지일 것이다. 보라색 얼레지 사이에 드문드문 피는 모습이 왕족에 견줄 만하다.

얼레지에 비해 흰얼레지는 꽃잎이 흰색이고 꽃잎 안쪽의 무늬가 황갈색이며 꽃밥이나 꽃가루도 황갈색을 띠는 점이 특징이다.

흰얼레지는 잎의 무늬가 검은 자주색이 아니라 흰색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꽃이 없을 때 잎만 보고도 찾아낼 수 있다. 얼레지야 군락으로 피니까 비교적 훼손이 덜하지만 흰얼레지는 그렇지 못해서 홀로 남겨놓고 돌아서는 마음은 늘 불안하다.

글·사진 이동혁(http://blog.naver.com/freebow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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