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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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제2부 불타는 땅 운명의 발소리(22) 밤이다.안개처럼 눅눅한 것이 얼굴을 덮는 것같다.이것이 나가사키의 밤인가.술에 취한 채 지상은 그런 생각을 한다.
두 사람은 조금씩 헛놓이는 걸음걸이로 골목을 빠져나왔다.검게색이 바랜 목조 주택들이 불이 꺼진 채 마치 무엇을 숨기기나 하듯이 늘어서 있었다.
골목을 돌아나오자,다가서듯이 물소리가 들려왔다.길남이 중얼거렸다. 『젠장.계집을 두고 그냥 가자니까…어째 송장 빼놓고 장사치른 거만 같다.』 내 보기에는 타고 나기를 그렇지도 않은데,새파란 놈이 뭐 오입질깨나 하고 다닌 놈처럼 허풍을 떨고 그러네.옆에서 지상은 말없이 걷고 있었다.발밑이 기우뚱거리는 것같았다. 멀리 어둠 속으로 희미하게 다리가 바라보였다.낮에 난간을 잡고 서서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그 다리였다.내가 예쁘다니까 저놈이 비웃었겠다.그래,그렇다고 하자.해도…아름다운 건 아름다운 거다.미치코도 아름답고 돌다리도 아름답다 이거다.
나는 그렇다는 거다.조선 것은 조선 것대로,조선여자는 조선여자대로 좋은 건 또 좋고 아름다운 건 또 아름다운 거 아니냐 이거지. 다리 위에 와 선 지상은 난간을 잡고 서서 밑을 내려다 보았다.물소리 뿐 다리밑은 캄캄한 어둠이었다.
비틀거리며 다가온 길남이 난간을 잡고 서며 내뱉듯이 말했다.
『너 임마,내가 왜 오늘 술을 샀는지 알아?』 지상이 고개를돌렸다. 『모르지? 왜냐 하면 말이다,뭐 하나 꼭 물어볼 게 있어서야.』 『뭔데?』 『너 그 일본여자랑 잤어 안 잤어?』 『실없는 놈.』 지상이 다리를 건너갔다.뒤에서 길남이 혀꼬부라진 소리를 했다.
『여자? 때려 치워.다 헛거야 임마.』 다리를 건너가면서 길남이 말했다.
『일본놈들 하는 짓,다 지렁이 갈비에 처녀 불알이다.미친 짓이지.끝났어.다 끝났다구.』 『너 조선말이라구 그렇게 함부로 떠드는 거 아냐,임마.』 『나? 나 다 산 놈이야.무서울 게 없다 이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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