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미로찾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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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0면

윗사람들이 어디 아랫사람 생각하나.그저 자기들 생각이나 자기들 모실 것만 강조하지.강태구는 곰곰이 머리를 굴렸다.무슨 묘안이 없을까.
희경은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정말 재미있다.그이가 시키는 대로 사길 잘했다.아마 이런 재미를 느끼고 사는 사람은 유사 이래 몇 안될 것이다.누가 자기가 살인자라고 공공연히 광고하며 산단 말인가.이제 30분 남았다.30분만 있으면 백마를 탄 왕자님이 푸른 물살을 헤치고 나타난다.그러면 나는 저 푸른 강물로 뛰어들어 그이의 뒤에 올라타 새로운 삶을 시작하리라.모든 과거는 뱀의 허물처럼 벗겨지고 빛나는 속살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리라.강물 저 너머로 모터 보트들이 한가로이 왔다 갔다 했다.그러나 아직 이리로 향하는 것은 없었다.강 위에는 오히려 경찰 보트들만이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맹한 놈들….그이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 줄도 모르고 알짱거리다니….그이는 그래봬도 구제불능인 내 병을 고친 사람이다.개고기도 못먹는 나에게 개고기를 먹게 하고 바퀴벌레도 못죽이는 나에게 사람을 죽이게 만든사람이다.
희경은 다시 시계를 봤다.27분 남았다.27!내가 가장 좋아하는 숫자다.어젯밤 그이가 그 미친 정신과 의사에게 어깨를 찔린 후 희경은 정신이 없었다.그동안은 막연히 그 남자에 대한 호감만 품고 있었으나 피를 흘리는 것을 보니 제 정신이 아니었다.이제는 복수고 나발이고 없다.무조건 그 남자를 지키고 모셔야 한다.왜 그렇게 당황했는지는 희경 자신도 몰랐다.그 때 희경은 비로소 자기가 그를 끔찍이도 사랑하고 있음을 발견했다.희경은 정말 마음이 아프다는 것이 이런 거구나 하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과거 유부남과 헤어졌을 때도,아기를 지웠을 때도,정민수와 헤어졌을 때도 이렇게 가슴 한복판이 저릿저릿 아프지는않았다.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가슴이 다 아플 수 있을까.그이와 함께 죽 음을 넘나든 게 사랑의 깊이를 더한 걸까.그래서 그이가 어깨를 4바늘 꿰매고 난 후에도 희경의 눈에서는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그때 그이가 말을 했다.그이가 말하는 모습은 너무나 멋있다.그때 아치 위에서 본 거지의 꾀죄죄한모습은 그 이가 그만큼 잘 생긴 남자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잘생긴 얼굴이야말로 조금만 일그러뜨려 놓으면 못생겨 보이는거니까….그러니 미인일수록 화장에 더 주의를 해야 한다.희경은얼굴 화장이 번지지 않게끔 눈물을 억지로 삼키면서 무슨 말을 했는지 다시 물었다.잘생긴 사람은 정신을 혼미하게 만든다.방금무슨 말을 했을까.그가 빙그레 웃으며 다시 말했다.
『못난 모습을 보여줘서 미안하구려.내 훗날에 그 놈을 무찌르는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만 당신의 깊은 슬픔을 보니 마음이 조급해졌소.내가 당신 슬픔을 달랠 수 있는 재밌는 놀이를하나 제의할 테니 생각해 보시오.』 희경은 고개를 끄덕였다.이제부터 그의 말은 무조건 따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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