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자를 '눈 멀게' 하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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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9면

1964년 여성들은 호르몬을 조절해주는 경구피임약의 탄생으로 '성 해방'을 맞이할 수 있었다. 이전까지는 오늘날의 임플라논과 같이 정자의 이동을 막는 물리적인 기구를 착용하거나 남성 파트너에게 콘돔을 사용토록 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이마저 완벽하지는 않았다. 1995~2000년 전세계에서 원하지 않은 출산은 3억건에 달한다. 호르몬을 조절하는 방식은 완벽한 피임을 이루기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보다 완벽한 피임약의 탄생은 불가능한 것일까. 최근 인간유전자를 속속들이 밝혀내는 지노믹스와 단백질 간의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프로테오믹스 기법의 발전으로 차세대 피임약의 개발이 한창이다.

세계적인 학술지 '네이처 메디슨' 3월호는 "미국 의약연구소(IOM) 등 세계 유명 연구소가 새로운 개념의 피임약 개발을 주도하고 있다"며 "앞으로 5~10년 내 피임약에 혁명이 몰려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IOM은 정자와 난자에서만 특이하게 나오는 유전자와 단백질에 주목하고 있다. 특히 정자와 난자를 싸고 있는 세포막 단백질이 목표이다. 정자와 난자가 합쳐져 수정란을 이룰 때 이들 세포막의 단백질 간 특이한 반응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정자의 A라는 단백질과 난자의 B라는 단백질이 초기 반응을 일으켜 수정에 성공한다고 가정했을 때 인위적으로 B단백질에만 특이하게 붙을 수 있는 A단백질 유사체를 체내에 주입해 정자의 접근을 차단하는 원리다.

수정란의 착상과정도 관심의 대상이다. 미국 메인주 잭슨연구소의 존 에피그 박사는 "질량분석기와 각종 첨단기기를 이용해 수정란의 착상에 관여하는 난자의 단백질 수개를 분리했다"며 "이 단백질의 작용을 방해할 수 있는 약물이 개발되면 착상을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광주과기원 조정희(생명과학과) 교수는 "정자의 운동성에 관여하는 단백질이 활동하는 것을 일시적으로 억제할 수 있다면 남성이 먹는 피임약의 개발도 가능하다"며 "정자에서만 특이하게 나타나는 단백질의 수가 난자의 특이 단백질 수에 비해 훨씬 많아 정자를 목표로 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 중"이라고 설명했다.

버지니아대의 존 헤어 교수는 최근 정자의 양을 간편하게 점검할 수 있는 '스펌 체크'를 개발했다. 정자의 세포막에만 특이하게 나타나는 단백질을 체크하는 것이다. 헤어 교수는 이들 단백질에만 들러붙는 인공항체를 만들어 원숭이 실험을 진행 중이다. 항체가 정자의 특이 단백질에 붙으면 난자를 인식할 수 없게 되는 원리를 이용하는 것이다.

'스마트 물질'에 대한 연구도 한창이다. 상온에서는 액체 상태로 존재하지만 온도가 상대적으로 높은 체내에서는 끈끈한 젤 상태로 변하는 물질이 후보다. 이를 응용하면 나팔관으로 이동한 뒤 통로를 막아 정자의 침입을 막게 된다. 물론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액체로 변해 완전히 제거될 수 있어야 한다.

심재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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