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42. 외로운 뉴욕생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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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미국에서 활동할 당시 디즈니랜드에서 포즈를 취한 필자.

뉴욕에서의 생활은 무엇보다 외로움과의 싸움이었다. 생각처럼 일이 쉽게 풀리지 않는 데다 일본이나 라스베이거스에서처럼 곁에서 힘이 돼주는 사람이 없었다. 매니지먼트를 해주는 회사가 있었지만 출연 교섭이나 스케줄 조정은 대부분 전화로 이루어졌다. 공연을 위해 움직일 때도, 공연을 할 때도 나 혼자였다. 의상도 메이크업도 혼자 해결했다.

예나 지금이나 어울리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아,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무대 위에서나 무대 밖에서나 언제나 혼자였다. 공연이 없는 날이면 집에서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고, 브로드웨이에 가서 싼 가격에 티켓을 구입해 뮤지컬을 관람하는 게 다였다. 스스로의 설움에 겨워 울기도 많이 울었던 것 같다.

가장 큰 위안이 됐던 것은 박춘석 선생의 편지와 전화였다. 전화도 쉽지 않던 시절이라 편지가 대부분이었지만 박 선생은 내가 미국으로 떠나오고 난 이후의 한국 대중가요계의 상황을 상세하게 알려줬다. 간혹 전화통화를 하면 내가 뉴욕에서 생각처럼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던지 한국으로 돌아올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패티! 지금 ‘틸’ ‘파드레’ ‘초우’가 얼마나 대단한 인기인 줄 알아요? 패티 김은 몰라도 ‘초우’는 다 안단 말이지. 지금이라도 빨리 들어와서 다시 한국 무대에 서라고. 아니 왜 거기서 그런 쓸데 없는 고생을 하고 있는 거야?”

안쓰러움 반, 답답함 반으로 박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그 말에 귀가 솔깃해져 마음이 흔들렸던 것도 사실이다. 한편으로는 이왕 미국에 왔고, 또 뉴욕에까지 왔는데 어떻게 해서든 끝장을 봐야겠다는 오기가 더 생겼다. 한국에 돌아갈 때 돌아가더라도 브로드웨이 뮤지컬 무대에 한 번은 서 보고 말겠다는 생각을 했다. 금의환향은 아니더라도 이대로 포기하고 돌아가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오만인지 모르겠지만 포기라든가 실패라는 단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패배를 자인하는 단어를 말하는 것은 스스로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즈음 내 형제 자매들은 대부분 미국이나 캐나다 등지로 이민을 떠났거나, 국제 결혼을 해 외국에서 살고 있거나, 또는 유학을 하고 있어 한국에는 어머니와 막내 동생 그리고 둘째 오빠 가족만 남아 있었다. 나는 어머니와 막내 동생을 뉴욕으로 데려오기로 마음 먹었다. 어머니와 함께 생활한다면 외로운 생활도 잘 견뎌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지만 방이 두 개 있는 아파트를 얻고 어머니를 모셔 올 준비를 했다. 변변한 가구 하나 없는 살림살이였지만 어머니께서 쓰실 침대도 마련했다. 뉴욕에서의 내 생활은 마음 먹은 대로 되는 일보다 그렇게 되지 않는 일이 더 많았던 것 같다. 그렇게 차곡차곡 준비를 했지만 결국 어머니를 모셔오지 못했다.

패티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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