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39. 뉴욕 오디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3면

몸매가 드러나는 수영복을 입은 필자.

나는 밥 맥 맥켄스와 5년 계약을 하고 라스베이거스에 왔다. 하지만 내가 그토록 뉴욕에 가고 싶어 하자 밥은 결국 나를 계약에서 자유롭게 해주었다. 라스베이거스에 온 지 1년8개월여 만이었다.

밥은 스키니와 함께 내가 뉴욕에서도 기본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많이 도와줬고, 출연교섭을 해주었다.

뉴욕은 한마디로 ‘벽’이었다. 뉴욕에 가기만 하면 당장 브로드웨이 뮤지컬에 출연하고, 그렇게 몇 번 나가면 자연스레 주인공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 누군가의 눈에 띄어 발탁 되고, 머지 않아 스타가 될 것이라는, 그야말로 야무진 꿈을 꾸었다.

동양여자가 출연할 수 있는 뮤지컬, 더욱이 동양인이 비중 있는 역할을 할 수 있는 뮤지컬은 거의 없다는 것을 그때까지도 생각하지 못했다. 나를 순진하고 어수룩하기 짝이 없는 동양소녀로 취급한 스키니가 내 모습을 제대로 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동양인이 출연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뮤지컬 가운데 하나인 ‘남태평양’은 내가 미국에 오기 10여 년 전에 이미 막을 내렸다. 영화 ‘왕과 나’는 율 브리너가 주인공으로 출연해 큰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같은 이름의 뮤지컬은 영화보다 훨씬 이전에 만들어졌다. 나는 그런 것들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생각도 없었다. 그때 나이 26세. 40년 전 스물여섯은 지금의 열여섯만큼도 성숙하지 못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몰랐기 때문에 더 용감할 수 있었던 것일까? 브로드웨이를 돌아다니며 오디션 공고문을 보기만 하면 일단 참가했다. 클라리넷 연주자로 유명한 베니 굿맨 오케스트라의 전속가수 오디션을 비롯해 이런저런 오디션에 수없이 나갔다.

귀가 번쩍 뜨일 정도로 정말 노래를 잘한다 싶은 경쟁자들도 보았다. 그들 중에 톰 존스, 비비 카가 있었다. 그들과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오디션을 보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정말 대스타가 됐다.

수없이 낙방했다. 오디션을 거듭하면서 깨달은 게 있다. 아무리 기를 쓰고 노력해도 나는 그들의 흉내를 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뉴욕은 미국 각지에서는 물론 전 세계 각국에서 쟁쟁한 아티스트들이 쉴 새 없이 모여드는 곳이다.

그런 곳에서 내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나보다 노래 잘하는 가수가 나만큼 노래하는 사람에 비해 더 많은 미국에서, 그것도 뉴욕에서 정말 스타가 될 수 있을까? 내가 뮤지컬 배우로 무대에 서는 날이 과연 올까?

지금까지 운명은 나의 편이었다.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적절한 때에 적절한 기회가 찾아왔다. 늘 내 편에 서서 도와주는 고마운 사람도 행운처럼 찾아왔다. 나는 비교적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갑자기 내 미래가 불투명해지기 시작했다. 뉴욕은, 미국은 결코 만만한 무대가 아니었다.

패티 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