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딘 슬픔’- 황동규(1938~ )
불을 끄고도 어둠 속에 얼마 동안
형광등 형체 희끄무레 남아 있듯이,
눈 그치고 길모퉁이 눈더미가 채 녹지 않고
허물어진 추억의 일부처럼 놓여 있듯이,
봄이 와도 잎 피지 않는 나뭇가지
중력(重力)마저 놓치지 않으려 쓸쓸한 소리 내듯이,
나도 죽고 나서 얼마 동안 숨죽이고
이 세상에 그냥 남아 있을 것 같다.
그대 불 꺼지고 연기 한번 뜬 후
너무 더디게
더디게 가는 봄.
봄도 너무 더디게 더디게 가는 것임을 비로소 알겠다. 눈뜨면 어젯밤까지 입술을 꼭 다물고 있던 목련이 활짝 피어나 순식간에 저 스스로 봄이 온 듯한데, 아직 겨울의 중력마저 놓치지 않으려 잎 피지 않는 나뭇가지가 쓸쓸한 소리를 내고 있구나. 죽고 나서도 얼마 동안 숨죽이고 이 세상에 그냥 남아 있는 것들, 그 더딘 발자취가 바로 봄, 봄의 형체로구나. 그래서 우리들의 늙은 부모가 무심결에 내뱉는 말씀인 ‘덤의 인생’이란 말을 함부로 흘려들어서는 안 되는 것이로구나. 우리에겐 아무렇지 않게 찾아온 봄도, 너무 빨리 피어난 꽃도, 거기에 무언가 지나가 버리는 것을 놓치지 않으려는 사랑의 중력이 작용한다는 사실을….
<박형준·시인>박형준·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