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11일만에 생환한 崔明錫군을 보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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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사랑하는 아들,명석아.일요일 아침 네가 2백30시간만에 기적적으로 살아나는 모습을 보고 나는 울었다.기뻐서 울고,고마워서울고,또한 미안해서 울었다.명석아.나는 너와 동갑내기의 아들을가진 죄많은 이 땅의 아버지중 한사람이다.너희 들에게는 정직을부르짖으며 실제로는 뇌물을 받아먹었던 아버지.너희들에게는 도덕을 부르짖으며 뒷구멍으로는 온갖 무도(無道)를 행하였던 아버지.너희들에게는 생명의 존엄성을 외치면서 실제로는 사람의 목숨보다는 돈벌이에 더 눈이 어두웠던 이 땅의 잘난 아버지중 한사람이다.그래서 기적적으로 구조되면서도 너무나 밝은 너의 모습.11일만에 구조되면서도 도무지 처참한 비극의 냄새라든가,인간승리의 비장한 극적 모습도 없이 아주 자연스럽게 마치 무슨 게임이라도 하듯 구조되는 네 알몸을 보았을 때 나는 네가 고마워서 울었다. 참으로 신세대다운 구조 모습이었다.참으로 X세대다운 너의 모습이었다.배가 고프면 종이상자를 뜯어먹고,비가 오면 빗물을 받아먹었다지.독한 매연에 숨이 막히면 양말을 벗어 바닥에고여있는 물에 적신 다음 코를 막았다지.눈을 뜨고 있으 면 죽을 것같은 절망감이 다가와 일부러 눈감고 잠만 계속 잤었다지.
처음 며칠간은 곧 구조될 것같은 생각으로 버티다가 나중에는 살려주려면 살려주고 말려면 말라고 생각했었다지.그 속에서 엄마.
아빠 생각 많이 했었다지.그동안 너무 못해드 린 것같아 앞으로잘해드려야겠다고 생각했었다지.그 깜깜한 어둠속에서 이승연이라는누나와 이름을 알 수 없는 아주머니와 끝없는 대화를 나눴다지.
그 누나가 죽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지.
『나 먼저 갈게.』 너처럼 젊은 그 누나의 마지막 말 한마디가 이 아버지의 가슴을 후려치는구나.예부터 수도원의 묘지에서는다음과 같은 문구를 묘비에 새겨놓곤 했었단다.
『오늘은 내 차례,내일은 네 차례(Hodie mihi,Cras Tibi).』 먼저 가겠다고 너에게 마지막 작별인사를 남긴그 누나의 말 한마디야말로 오늘을 사는 이 못난 아버지들이 뼛속 깊이 새겨야 할 교훈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죄없는 우리의 어린 아들.딸들이 한순간에 무너져내린 콘크리트속에서 숨을 거두면서 이 못난 어른들을 원망치 않고 이렇게 말했다는구나.
『먼저 갑니다.』 살아남은 우리도 언젠가는 그 누나의 뒤를 따라갈 것이다.비록 무너져내린 백화점건물에 깔려 한꺼번에 죄없는 수백명이 먼저 숨을 거두었지만 내일은 우리도 차례가 되어 그들의 뒤를 따라갈 것이다.그 누나의 말처럼 먼저 가고 뒤에 가는 순서의 차이만 있을 뿐 먼 영원에서 보면 눈 깜짝할 만한인생인데도 이 못난 이 땅의 아버지들은 돈에 눈이 어두웠구나.
권력에 눈이 멀었구나.물질에 중독이 되어 있구나.부패에 썩어있구나.그래서 온갖 부정의 백화점을 무너뜨리고 말았구나 .
사랑하는 명석아.그래서 이 못난 아버지들은 너에게 미안하다.
또 너는 병원의 침대위에서 죽음과 처절한 싸움을 벌인 흔적이라고는 전혀 없이 마치 서태지처럼 붕대를 감고 누워서 이렇게 말했다는 구나.너를 구해준 구조원 아저씨들에게 감사를 드리고 어디에선가 너처럼 살아있을 생존자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었다는구나.네말이 또한번 서둘러 구조작업을 끝내려는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었구나.네말대로 최후의 한사람까지 어딘가에서 『살려주세요』하고 너처럼 외치고 있을지 모르는 생존자를 위해서라도 우리는 삽질을 멈춰서는 안된다.마지막 한순간까지 포기해서는 안된다.왜냐하면 무너진 콘크리트 속에서 살아나오는 너의 모습은 자궁속에서 태어 나오는 갓난아이처럼 보였으므로.너는 좌절과 슬픔,고통과 절망에 빠져있는 우리 국민들에게 생명이란 저처럼 존엄한 것이라는 사실을 일깨 워준 우리시대의 신생아(新生兒)인 것이다.회색의 콘크리트 속에서도,절망의 돌더미속에서도 새 생명이 탄생할 수 있음을 보여준 너의 출산(出産)이야말로 그 어떤종교보다 깊고,그 어떤 소망보다 거룩하였다.너야말로 죽음과 절망의 무덤속시 서 부활하여 우리곁에 나타난 메시아의 표징이니 이 못난 아버지들은 너에게서 새 생명을 얻어야 한다.이 못난 아버지들은 그 타락과 독선.이기주의와 탐욕,거짓과 부패의 허물들을 저 삼풍백화점과 더불어 다 허물어뜨리고 너처럼 신생아로 새 로 태어나야 한다.그것을 일깨워준 최명석에게 이 죄많은 아버지는 용서를 빈다.미안하다.그리고 정말 고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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