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레터] ‘돈 안되는 책’ 내는 아름다운 출판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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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돈 벌려고 낸 책은 아니죠.”

출판계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종종 듣는 말입니다. 그리고 쏟아지는 신간들 속에서도 ‘돈 안되는 책’들을 심심찮게 만납니다.

최근 출판사 열린책들은 『열린책들 편집 매뉴얼』이란 독특한 책을 내놓았습니다. 맞춤법과 띄어쓰기 원칙, 외래어 표기법, 편집·조판 원칙 등을 모조리 묶어둔 책입니다. 거기에다 “글씨 크기는 한자를 한글보다 한 포인트 작게 해야 보기 좋다”“보관용 책으로 3권은 완전 포장하고, 2권은 열람 가능하게 남겨둔다” 등의 실무 비법까지 담았으니, 출판사 내부의 ‘대외비’를 엿본 듯 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원래는 내부용 자료집이었답니다. 그러다 “다른 출판사 편집자들의 수고를 덜어 줄 요량으로 시판한다”는 ‘용기’를 냈다는군요. ‘자사 이기주의’를 벗은 통 큰 결심이지요. 더욱 놀라운 건 책의 정가였습니다. 356쪽짜리 제법 두꺼운 책인데도 정가는 3500원. “가능한 한 모든 편집자들이 부담없이 활용할 수 있도록” 출판사 이익 없이 책정한 가격이랍니다.

출판사 한울림이 내놓고 있는 장애 자녀 육아책들도 ‘돈 되는 책’은 못될 것 같습니다. 한울림은 최근 한달 동안만도 『자폐 어린이가 어른들에게 꼭 알려주고 싶은 열 가지』『장애아로 키우지 마라』 등 세 권의 관련 책을 출간했습니다. 장애인 관련 책이야 기존 책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이 성공한 장애인이나 장애아를 꿋꿋하게 키워낸 부모의 ‘감동수기’류지요 . 한울림에서 펴낸 책들은 장애아 부모들을 대상으로 한 순수한 실용서입니다.

“몇 부나 나가겠어요”란 ‘속된’질문이 절로 나왔습니다. 한울림 곽미순 사장의 대답이 그랬습니다. “돈 벌려고 낸 책은 아니죠.”

물론 이들 출판사들이 돈 안 되는 책만 내놓는 건 아닙니다. 열린책들은 지난해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작소설 『파피용』을 출간해 40만부나 팔았고, 한울림은 『Hello 베이비 Hi 맘』『아름다운 가치사전』 등 다수의 스테디셀러를 보유한 출판사지요. 하지만 돈 욕심이야 벌면 벌수록 더 커지게 마련인데….

출판계의 이런 소신엔 긴 역사가 있습니다. 올해로 출판 경력 64년째인 을유문화사 정진숙 회장은 자서전 『출판인 정진숙』에서 “남이 이런저런 이유로 안 내는 책, 그러나 반드시 내야 하는 책이라고 판단하면 출판했다”고 밝힙니다. “수지타산을 맞춰보지도 않았다”면서요.

자선사업도 취미생활도 아닌 자신의 생업을 두고 이런 호기를 부릴 수 있는 업종이 얼마나 될까요. 고맙고, 또 부러운 일입니다.

이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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