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길 떠나는 책’ ⑥ -<걷는 행복>, <일상적인 삶>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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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회복하는 방법

내 친구 K가 근무하는 사무실은 도심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다. 고등학교 시절까지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소읍에서 살았다는 믿기 힘든 경험의 소유자인 그는, 가끔씩 직장 생활에서 가장 힘든 게 ‘첨단 사무실’이라고 말했다. 그럴 때마다 친구들은 ‘배부른 소리’라며 타박하기 일쑤였고, K는 언제나 억울해 죽겠다는 반응이었다. 친구 중 하나가 K의 사무실에 들를 일이 있었는데, 으리으리한 외관은 물론, 누가 봐도 쾌적한 인테리어 환경 때문에 탄성이 절로 나오더라고 했다. 한 친구는 그 건물을 건축 잡지에서 봤다며 거들었다.
K가 다니는 회사가 첨단 건물에 입주한 건 서너 해 전이었다. 대부분의 동료가 새 사무실에 대해 호평을 거두지 않았다. 하지만 처음부터 K의 생각은 달랐다. 가장 불만스러웠던 건, 스스로 창문을 열 수 없는 사무실 구조였다. 첨단 환기 장치로 내부 공기를 정화한다곤 했지만, 8시 이후엔 그마저도 작동이 멈추기 때문에 사나운 시멘트 공기가 점령군처럼 사무실로 들어선다고 말했다. 해법이 없다면 고통은 나날이 커질 상황이었다. 우선 사무실이 입주한 건물 안에서 해법을 찾겠다는 생각은 버렸다.
해법을 찾기로 작심한 첫날부터 K가 진행한 프로젝트는 건물을 둘러싼 지역의 골목을 뒤적이는 일이었다. 생각보다 상황은 더 나빴다. 뉴타운프로젝트라도 진행되는 동네처럼 건물과 건물 사이에는 아무런 감흥이 일어나지 않는 대리석과 시멘트의 조합들뿐이었다. 건물을 휘감고 들이치는 바람도 세찼다. 그건 건물의 세워진 각도와 높이에 정확히 비례하는 도심 속 재앙이었다. 이제 마지막 남은 방법은 건물 건너편에 자리한 주택가로 들어서는 일 뿐이었다. 애초에 생각했던 곳이긴 했지만, 골목골목 들어선 계단들 때문에 마음을 접었던 곳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남다른 것이었다. 골목과 골목 사이의 운치가 어느 곳보다 괜찮은 곳이었다. 한적한 골목과 계절에 입 맞춘 마당의 꽃들, 수시로 출몰하는 계단과 색다른 시야가 너무 매력적이었다. 이른 점심을 해결하고 길 건너편 골목길로 드나들기 시작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스트레스가 심한 날이면 슬며시 사무실에서 빠져 나와 골목골목을 누볐다. 그러던 어느 날 K가 떠올린 생각이 바로 자신이 걷기에 중독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걷기는 마약이다. 감미롭고 위험하지 않다. 그것은 중독시키지 않으면서 쾌감을 준다. 노예로 만들지 않고서도 습관화한다. (중략) 실제로 나는 절제하지 않고 소비하는 마약에 중독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걷기이다. 그것은 강력하다. 거저다. 교묘하다. 반복되는 쾌락의 위기 외의 다른 부작용은 없다. 그것은 나를 세상의 끝으로 인도한다. 최소한 나의 산책은 그렇다. 나는 그것을 고백한다. 나는 그것을 취하고 과잉으로 소비한다. (중략) 걷기는 합법적이고 친근하고 생산적인 마약으로 긍정적인 습관을 갖도록 한다. 7세에서 77세의 젊은이들에게 그 사용을 권하는 것이 좋다. 나는 그것을 써왔고, 7세 이전부터 벌써 남용해왔다. 그리고 77세 이후에도 중독되어 있기를 바란다. 내 심장이 뛰는 한, 그리고 내 다리가 닳아 없어지지 않는 한. 그렇기 때문에 나는 여기서 경험 하나를 말하고자 한다. 나아가서 몇 가지의 사용법을 밝히고자 한다. 걷기의 마약은 장비가 거의 필요 없다. 수저도, 부지도, 주사기도, 파이프도, 흡입기도, 말아 피울 종이도 필요 없다. 최소한이면 족하다. 한 발을 다른 발 앞에 놓을 수 있는 인간의 몸이면 된다. 양말과 신발만 있으면 족하다(다른 복장은 선택사항이다. 극지방과 티벳에 가려면 다른 필수품이 필요하긴 하지만). 배낭 하나 이외의 다른 장비는 거의 필요 없다. 장비가 필요 없는 까닭은, 걷는 일이라는 게, 아무 것도 아닌 일이기 때문이다.” (<걷는 행복>, 이브 파칼레 지음, 궁리) 187, 189, 193p 중에서 발췌

걷기의 회복이 K에게 가져다 준 변화는 굉장한 것이었다. 앞서 언급한 K의 ‘소읍에서의 생활’은 걷기로 시작해 걷기로 끝나는 게 다반사였다. 학교를 가기 위해 집을 나서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매일 10km 정도를 걷던 그였다. 하지만 서울로 올라와 사회생활이라는 걸 시작한 뒤의 생활 패턴은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소위 도시화는 자연에 익숙했던 그의 몸과 마음을 퇴화시켰다. 걷기는 아주 특별한 체험이 될 정도로 비일상적인 것이 됐고, 산책은 바쁜 스케줄을 쪼개고 쪼개 챙겨야 하는 고급한 취미 생활 중 하나가 돼 버렸다. 사무실 근처를 걸으면서 그가 회복한 건 몸 뿐만은 아니었다. 경기도 소읍에서 유년시절부터 청년기까지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몸에 입력시켰던 마음도 회복되기 시작했다. 물론 점령당한 일상을 다시 회복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상이 뭔가? 가장 자연스러운 삶, 가장 인간적인 스케줄이 바로 일상 아닌가. 그런 일상을 회복하기엔 K는 지나치게 바빴다. 어떤 계기, 어떤 의도를 찾지 못한다면 일상의 회복은 요원해 보였다. 걷기에서 살짝 확장된 의미로 산책을 떠올린 게 그 때였다. 산책과 관련된 매뉴얼을 찾아 머릿속에 입력했다. 그게 바로 장 그르니에의 <일상적인 삶>(민음사)에 등장하는 ‘산책’ 편이었다.

“산책은 의도적인 행위이다. 그런데 언뜻 보기에 여행보다는 훨씬 덜 의도적인 것 같다. 여행은 목적지가 있지만 산책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건 피상적인 차이일 뿐이다. 사람들이 산책하거나 산책시킬 때 결코 아무 때나 아무렇게나 하려는 그러는 것은 아니다.
산책에서 장소는 얼마나 중요한가? 어떤 공원들은 그 이름이 아예 ‘산책(로)’이다. 그리고 극장이나 뮤직홀에는 프롬느와르, 즉 입석 공간이 마련되어 있는데 이 말은 원래 주민들이 자주 산책하는 가로수길을 의미했었다. 파리에서 먼 시골의 작은 마을에서는 기차역이 사람들을 끄는 곳이다. 기차가 들어오는 시간이면 산책하는 사람들은 역으로 모여들어, 십중팔구 모르는 이들인 여행객들이 지나가는 것을 구경한다.
시간은 어떤가? 산책하기에 좋은 시간이 있는데, 낮의 열기가 사라진 뒤나 하루 일과가 끝나고 난 뒤의 시간, 그러니까 온대 기후에서는 해질 무렵이 그렇다. 다른 기후대에서는 밤이 좋다. 그 밖의 시간대에 하는 것은 산책이라기보다 차라리, 하루 일을 마친 후 잠시 쉬면서 거니는 소요 정도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어떻게’ 산책하느냐의 문제를 들 수 있는데 이는 간단치가 않다. 어쨌거나 육체와 정신의 긴장을 풀 수 있도록 해야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까지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산책하면서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기 집에 머무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진정한 산책자로 남는 일보다 더 미묘한 일은 없다. 진정한 산책자는 이렇듯 양자의 ‘사이’에 놓이는 존재이며 스스로도 그 점을 잘 알고 있다.”

장 그르니에의 책 속에는 다양한 산책에 대한 매뉴얼도 함께 들어 있었다. 강요에 의한 산책, 목적이 있는 산책, 친교를 위한 산책, 철학적인 산책, 자연과의 교감을 위한 산책, 산책에서의 성과 속, 약식의 산책과 완전한 산책 등등. K는 가급적 그렇게 분류된 산책 모두를 해보기로 했다. 단, 결코 강박적인 행위여선 안 된다는 게 전제였다. 그 순간 몸과 마음을 다시 망칠 게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 K가 이번 주말을 위해 세워놓은 산책 스케줄은 ‘친교를 위한 산책’이었다.

“친교를 위한 산책은 널리 애호되는 ‘교제’의 한 방식이 될 수 있다. 가을에는 사냥터에서, 겨울에는 살롱에서 그리고 옛날 극장의 휴게실에서 그랬던 것처럼 여름에는 산책이 서로 다른 신분의 사람들을 만나게 해준다. <괴테와 에커만의 대화>를 읽어보면 에커만 대공의 문예담당 대신이었던 괴테가 그와 함께 얼마나 자주 산책을 했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때때로 숲속에서 야영하면서 두 사람은, 궁정의 분위기에서는 하기 어려웠을 자유로운 대화를 나누곤 했다.”(같은 책, 41p)

그렇다면 장소는? 오대산 월정사의 전나무 숲길 혹은 횡성의 풍수원 성당이 어떨까, K는 궁리 중이다.

글_ 자유기고가 문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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