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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풍경] 종로통 무대 삼은 거리의 기타리스트 김학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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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인생 43년이야 웃기지 말라 그래."

도심의 소란이 가로등 불빛 아래 잦아드는 저녁 호기롭게 외치며 인사동의 한 술집 문을 열어젖힌다. 검은색 기타 가방을 둘러멘 청바지에 흰머리 할아버지. 신기함.호기심 또는 익숙함이 뒤섞인 눈길이 쏟아진다. 서울 종로 밤거리의 명물, 인사동과 청진동을 무대 삼은 기타 인생 김학종(62)씨다. 꾸벅 인사하며 자리에 끼어드는 그의 몸동작이 자연스럽다.

"목포의 눈물. 1934년. 이난영…" 노래 족보로 시작하는 그의 라이브공연은 '신라의 달밤' 등 흘러간 노래에서 '네 박자' 등 최신 트로트와 '유 아 마이 선샤인'같은 팝송까지, 시대와 장르를 넘나든다. 적당한 높이의 듣기 좋은 목소리는 아직도 호소력이 있다. 수준급 기타 솜씨에 현란한 스텝의 춤은 보너스다. 함께 노래하고 박수치는 술꾼들도 신명이 난다.

골목을 돌아 들른 다른 집 역시 그의 사랑방이다. '광화문 연가'신청에 흘러 나오는 노래는 엉뚱하게도 '돌아와요 부산항에'. 가수 맘 대로다. 흥겹게, 구성지게, 빠르게, 부드럽게… 테이블의 분위기에 노래를 맞추는 것은 그의 오랜 노하우다.

원래 시흥 사람인 그는 서울 서라벌고로 전학하면서 삶이 바뀌었다. 3학년 소풍 때 서울내기 친구의 기막힌 기타연주를 보고서였다. 아버지를 졸랐다. 기타 사주세요. 딴따라를 천하게 여기던 시절, 장남의 황당한 요구였지만 아버지는 선선히 주머니를 풀었다. 단 조건이 있었다. 기타를 업으로 삼지 않는다는.

서울과 부평을 오가며 배운 1년8개월 동안 매일 10시간 넘게 연습을 했다. 하루 한곡씩 떼며 600여곡을 섭렵하니 소리가 보였다. 1961년 동아방송 가요백일장에서 '신라의 달밤'을 불러 2등을 했다. 기타로 아침을 맞고 노래로 밤을 새우는 생활에 당연히 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농사일을 맡기고 일꾼들 감독하라면 기타 들고 도망가는 아들이 못미더웠던 것이다. 아버지 손에 박살난 기타가 스무 개는 될 거란다.

멋있게 놀고 돈 잘 쓰며 여성들을 '줄줄 달고 다니던' 이 핸섬보이는 군에서도 인기만점이었다. '고기 먹으며' 장기를 뽐내던 훈련소 시절부터 베트남 파병을 거쳐 전역할 때까지 어딜 가나 환영받았다. 결혼 뒤 식솔이 딸리며 '마냥 놀기만 할 수 없어' 시작한 직장생활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동아건설에 다닐 때는 사우디 현장에서 야마하 기타를 들고 근로자들 앞에서 분위기를 휘어잡기도 했다.

그러나 버는 것보다 큰 씀씀이 앞에 그 많던 유산은 화수분이 아니었다. 거기에 5년이 넘는 어머니의 투병 뒷바라지로 인해 그의 삶은 급격히 궤도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직장도 그만둔 상태에서 대대로 살던 고향의 집마저 경매로 넘어갔다. 그 뒤 농사일도 해보고 가게며 좌판도 벌여봤지만 신통찮았다. 그러다 환란을 맞았다. 자신만 바라보고 있는 아내와 네 아이가 눈에 밟혔다.

그러던 어느 날 종로에서 유니폼을 입고 기타.아코디언을 멋들어지게 연주하는 괴짜들을 만났다. 눈이 번쩍 뜨였다. 다시 틈틈이 기타를 잡기 시작했다. 하던 일 다 정리하고 종로로 아주 나선 1999년 8월 16일은 몹시 더운 여름밤이었다. 가족들은 싫어했지만 그는 절박했다. 그러나 현실은 차가웠다. 객들의 무시, 가게주인들의 문전박대에 마음 상해 시비가 붙고 때로는 취객들과 드잡이도 했다. 상처 난 자존심에 주머니에 있던 돈을 길거리에 뿌린 적도 있다. 어렵던 시절 자신을 감싸준 '시인통신' '목포집'… 여기에 드나들며 자기의 딱한 사정을 듣고는 심심찮게 몇 만원씩 찔러주던 몇몇 문화예술인을 그래서 그는 잊지 못한다.

-주로 어디 들르세요?

"오아시스.목포홍탁.시인통신.목포집.유황오리집.사랑과 야망.가을.소문난 집.정종대포집.세진호프.실비집.다연.구름에 달가듯이…"

30여개의 상호가 막힘없이 쏟아진다. 하나같이 단골이 많고 주인들이 푸근하기로 소문난 집들이란다.

-노래방에도 들어가세요?

"에이 안가. 동종업계인데. 고급 한정식 집에는 가끔 가. 그런데 판검사.경찰들이 짜다고 하잖아. 내가 기타 치면 지갑서 2만원은 꺼내."

-이효리 아세요?

"아이고 요즘 애들 노래가 어디 노래야. 시시해서 안 해. 송대관.설운도.현철이 노래는 배우지."

이제 그는 누가 알아볼까봐 모자를 푹 눌러쓰고 다니지 않는다. 얼굴이 알려지며 생활도 웬만큼 자리를 잡았다. 요즈음은 일주일에 월.화.목.금 네번 나온다. 일을 마치면 새벽이라 의정부에 있는 집에 가기 힘들어 낙원상가 옆의 월세 20만원짜리 쪽방에서 고단한 몸을 뉜다.

넌지시 물어본 수입. 대기업 과장 부럽지 않단다. 아내에게 가져다주는 돈에 따라 그는 어떤 날은 사장님이 되고 어떤 날은 회장님이 된다. 일 나올 때마다 재미삼아 2000원짜리 로또 하나씩은 사고, 잃어버리길 잘해 휴대전화는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는 그는 하루가 즐겁다. 아니 즐겁게 살려고 노력한다.

걱정스러운 것은 전 같지 않은 몸이다. 술을 못 견뎌 거리에 쓰러진 적도 있다. 그런 그를 노려 호주머니를 털어가는 건달들도 있다. "괜찮아. 나보다 못한 사람들이 가져가는 건데 뭐"하며 세금이라고 생각한단다.

이제 쉬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까. 그러나 아직 때가 아니다. 구름처럼, 바람처럼 떠돌던 자신 때문에 젊어서부터 혼자 속앓이 하며 고생해온 아내, 그의 큰 자랑거리인 대학교 다니는 '장학생' 막내딸을 생각하면 아직 손을 놓을 수없다. "그런데 거리의 악사라고는 쓰지 마." 번듯한 예술가는 아닐지언정 싸구려 인생으로 비칠 것 같아 못내 신경 쓰이는 눈치다.

인사동에서 출발해 재개발로 허리가 뚝 잘린 피맛골을 거쳐 다시 왔던 길을 톺아 가는 그의 걸음걸이가 적당히 오른 술기운을 타고 부드럽게 출렁인다. "인생은 부딪치는 거야."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호기롭고 씩씩하다. 그런 그의 가방엔 98개째 기타라는 칠 벗겨진 '성원 35호'와 2벌의 예비 줄, 그리고 가족의 생계가 들어 있다.

그의 얄팍한 어깨 위로 종로의 밤이 깊어간다.

글=안충기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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