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Story] 난립한 레미콘업체, 네가지가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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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레미콘 업체 사장들은 요즘 죽을 맛이다. 수도권 아파트 공사에 쓰이는 레미콘은 ㎥당 5만600원에 팔린다. 2002년 4월 가격과 똑같다. 같은 기간 생산자물가는 21% 올랐다. 레미콘 업체가 6년간 112개 늘어나면서 공급이 수요보다 많아졌기 때문이다. 살 사람은 한정돼 있는데 팔겠다는 사람이 늘면 가격이 오를 리 없다. 업계 관계자는 “원자재 값 상승을 가격에 반영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방법이 없다”고 하소연했다.

레미콘 업체 단체행동의 직접적 원인은 원자재인 시멘트 값(11.3%) 상승이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원인은 수년간 누적된 공급 과잉이다. 게다가 업체 간 계약이 아닌 단체협상으로 가격을 정하다 보니 시장가격을 통한 자연스러운 구조조정이 어려웠다.

◇고질적인 공급 과잉=1987년 118개였던 레미콘 업체는 지난해 693개로 6배로 늘어났다. 시멘트 혼합 장비와 차량만 있으면 큰돈 들이지 않고 창업할 수 있기 때문에 건설업 종사자들은 건설 경기가 좋아질 때마다 앞다퉈 레미콘 사업에 뛰어들었다. 제값 받기가 어려운 것은 물론이고 공치는 날도 늘었다. 87년 49.5%였던 가동률은 지난해 29.1%까지 떨어졌다. 건설업체 도산이 잇따르고 있는 지방에선 가동률이 10%가 안 되는 업체도 있다.

원자재 가격의 상승에 대비해 다른 비용을 줄이려는 노력도 없었다. 레미콘 가격에서 운송비가 차지하는 비율은 15~20%에 달한다. 레미콘이 운송 중에 굳어지지 않게 하려면 90분 안에 배송해야 한다. 도심 교통난과 기름 값 인상으로 운송비는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일본은 업계가 자율적으로 공동 운송망을 만들어 운송비를 낮췄다.

◇희한한 가격 결정 구조=레미콘 가격은 개별기업 간 계약이 아닌 단체협상으로 정해진다. 이에 따라 2006년 3월에 일률적으로 3% 내렸고, 지난해 8월 전 업체가 똑같이 4%씩 올렸다. 잘하는 업체나 못하는 업체나 똑같은 가격을 받았다. 시장에서 자유로운 가격경쟁이 없으니 업체의 경쟁력도 점점 떨어졌다. 그 피해는 집을 사고, 건물에 입주하는 소비자에게 돌아간다. 주유소의 담합으로 소비자들이 싼 주유소를 찾기가 어려운 것과 같은 이치다.

게다가 원가가 아무리 올라도 발주 가격은 달라지지 않았다. 결국 원가 상승 부담을 힘없는 업체가 떠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공급 중단 같은 극한 대응이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지난해 정부는 주요 건축자재 가격이 15% 이상 오르면 정부 발주 공사의 발주가격을 올릴 수 있도록 했지만, 세부 지침이 정해지지 않아 무용지물이었다. 최민수 건설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비용 인상요인을 부문별로 분담할 수 있도록 계약 관행을 바꿔야 한다”고 지적했다. 레미콘 업체가 투명하지 않은 것도 가격 구조를 왜곡시켰다. 레미콘 업계 관계자는 “자금줄이 막힐까 봐 1억원 적자를 내도 100만원 흑자가 난 것으로 꾸밀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레미콘 업체가 아무리 앓는 소리를 해도 건설업체가 못 미더워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김정식 연세대 교수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산업·유통 구조를 경쟁 체제로 바꿔야만 원자재 상승에 따른 물가 충격을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김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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