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율 급등, 범인은 해외펀드 환헤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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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아들과 딸을 미국으로 조기유학 보낸 기러기 아빠 김모(47)씨는 요즘 환율 급등으로 머리가 아프다. 아들·딸에게 보내는 송금액이 석 달 만에 600만원에서 670만원으로 많아졌기 때문이다. 사실 김씨는 환율 변동을 빈틈없이 따지는 고급 투자가다. 지난해 봄 가입한 남미펀드도 환 헤지가 된 펀드를 택했다. 환율 변동으로 인한 손실을 피하려면 환 헤지가 필요하다는 은행 직원의 권유가 그럴 듯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씨는 자신의 해외펀드가 최근 환율 급등세에 단단히 기여했다는 것까진 모르고 있다.

상황은 이렇다. 자산운용사들은 해외펀드의 환 헤지를 하기 위해 대개 선물환 거래를 한다. 예컨대 1억 달러를 해외에 투자하면 1년 뒤에 돈이 들어올 것으로 생각하고 미리 일정한 환율로 1억 달러 ‘선물환’ 계약을 하는 것이다. 환율을 미리 정해 놓은 거래를 통해 미래의 환율 변동에 따른 위험을 피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해외펀드가 투자국의 주가 하락 등으로 손실을 보게 되면 문제가 생긴다. 펀드가 20% 손실을 봐서 자산이 8000만 달러로 감소했다고 하자. 이론상으로 해당 펀드는 8000만 달러만큼에 대해서만 환 헤지를 하면 되고 그만큼의 선물환을 팔아 놓으면 된다. 그런데 이미 1억 달러어치의 선물환을 팔아 놓았으니 2000만 달러어치를 더 판 셈이 된다. 이렇게 적정량 이상으로 팔아 놓은 선물환은 다시 사들여야 한다. 이번엔 2000만 달러에 대해 선물환을 매수하게 된다. 사실상 달러를 사들이는 셈이다.

최근 글로벌 증시 하락으로 해외투자펀드들의 손실이 커지면서 이 같은 선물환 매수가 한꺼번에 일어났고 원-달러 환율을 끌어올리는 압력으로 작용했다. 일부 운용사는 다른 방식으로 환 헤지를 하기도 한다. 선물회사에 증거금을 주고 달러선물을 팔아 달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환율이 급상승하면 선물회사에 냈던 증거금이 부족해진다. 선물회사들은 증거금을 더 내라는 요구(마진콜)를 하고, 운용사들은 증거금을 더 내거나 부족한 증거금에 해당하는 달러선물 매도분을 청산하기 위해 달러선물을 사들여야 한다. 17일 원-달러 환율이 31.9원이나 급등한 것은 운용사들의 이 같은 선물환·달러선물 매수가 한꺼번에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기획재정부 고위 관계자는 “운용사들의 달러 수요가 그토록 일시에 몰려나올 줄 몰랐다”며 “주식형 해외투자펀드만 520억 달러에 달하는 ‘펀드 해외투자 시대’가 낳은 괴물 같은 현상”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다른 나라는 해외펀드의 환 헤지 비율이 주식형은 50% 정도”라며 “우리는 해외펀드에 대해 환 헤지를 무조건 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이상렬·김선하 기자

◇선물환 =장래의 일정한 때에 일정한 환율로 외환을 주고받기로 계약하는 것. 예컨대 달러당 원화 환율이 1000원일 때 1억 달러를 투자해 10%의 수익을 올렸다 해도 환율이 900원 밑으로 떨어지면 손해를 보게 된다. 이처럼 환율 변동에 따른 손실을 피하기 위해 만든 거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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