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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져도 울지 않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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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해마다 이맘때면 수많은 젊은이가 학교생활을 시작한다. 교정은 새로운 희망과 기대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과연 이들의 희망과 기대는 충족될 수 있을까. 이들은 올바른 교육을 받을 수 있을까. 정규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공교육이 붕괴되었다는 이야기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교육은 이미 사교육 시장에서 거래의 대상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교육의 본래적 가치는 실종되고 정글의 법칙으로 대체되었다. 이는 보통교육에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대학 이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고등교육도 시장의 요구에 맞추느라 교육의 본래적 기능을 외면하고 있다. 교육의 실패는 개인의 인격 실패를 초래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러한 개인에 의해 운영될 국가와 인류의 장래 또한 암울하게 한다. 교육에서 실패해서는 안 되는 까닭이다.

교육은 무엇이든 많은 것을 알도록 하는 것이라는 오해가 있다. 그리하여 이도 나지 않은 아이에게 딱딱하게 굳어버린 통조림을 퍼 먹여 영양실조의 비만아를 만들고 있다. 다 자라지도 않은 어린아이의 작은 머리 위에, 좁은 어깨 위에, 연약한 등 위에, 고사리 같은 손과 발 위에 파편화된 지식의 더미를 얹어 짜부라지게 하고 있다. 진정 알아야 할 것을 다 알기도 전에 몰라도 되는 것들에 쫓기게 하고 있다. 그러나 교육은 밖에서 주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끌어내는 것이다. 이를 튼튼히 자라게 하면 무엇이든 잘 씹어 소화할 수 있고, 몸이 건강하게 자라게 하면 무거운 짐도 가볍게 감당할 수 있다. 누구나 저마다의 재능이 있다. 클릭 한 번이면 검색 가능한 과거의 정보 뭉치들이 재능 계발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알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알 수 있게 하는 것, 타고난 재능을 스스로 현출하도록 돕는 것 이상으로 교육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교육은 일정한 견해와 태도를 갖도록 하는 것이라는 오해가 있다. 관습이든 전통이든 관행이든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기성의 익숙한 것들에 적응하도록 강요하는 것이 교육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심지어는 일제와 군사독재의 잔재에 불과한 집체(集體) 교육의 악몽이 일부 대학의 신입생 교육에서 재현되고 있음을 본다. 개인의 가치와 존엄성을 철저히 무시하고 집단과의 일체감을 주입시키는 데 폭력도 희롱도 마다하지 않는다. 지성의 전당이 야만의 경연장으로 타락하고 있다. 그러나 교육은 개인을 일정한 고정관념의 노예로 만드는 일회성 세뇌작업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더욱 가치 있는 존재로 발전시키는 정신적 고양의 과정이어야 한다. 미리 정해진 틀에 가두고 그것을 견디게 하는 극기훈련을 교육이라 할 수 없다. 오히려 알을 깨고 나와 새로운 세상을 만나도록 돕는 것이 교육의 존재 이유다.

그렇다면 그러한 교육은 어떻게 가능한가. 인간은 영혼과 정신, 그리고 신체를 타고나는 존재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아직 잠재된 데 불과한 능력을 깨워 발양해야 한다. 그러려면 스스로 체험케 해야 한다. 스스로 느끼고 깨닫고 행동하게 해야 한다. 예를 들면 셰익스피어가 몇 권의 희곡을 언제 썼느냐를 암기하는 것은 중요한 게 아니다. 그의 희곡을 직접 소리 내어 읽으며 등장인물들과 함께 울고 웃으면 저절로 인간도 사회도 배우게 되고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풍요로운 어휘도 자연스럽게 체득하게 된다. 꽃이 지는 것을 바라보면 눈시울이 젖어 드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꽃이 져도 울지 않게 하는 것은 교육이 아니다. 꽃의 학명과 성분이라든지, 어떤 계절적 변화가 꽃을 지게 하는지를 아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교육을 통해 꽃이 져도 울지 않게 된다면 그 교육은 충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실패한 것이다.

결국 가장 잘, 가장 많이 자기 자신이 되게 하는 것, 자신이 존엄한 존재임을 자각하게 하고 개성을 최대한 발휘하게 하는 것, 그것이 교육의 본래적 모습이다. 한국의 교육은 교육의 본질을 묻는 데서 살길을 찾아야 한다.

김선택 고려대 교수·헌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