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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는한국현대사><스티코프비망록>4.좌우합작 추진말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1946년 5월 美군정이 김규식(金奎植)과 여운형(呂運亨)을중심으로 좌우합작을 추진할 때 소군정(蘇軍政)이 이를 강력히 저지하려 한 사실이『스티코프비망록』에서 처음 밝혀졌다.또 좌우합작 세력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미군정이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을 설치하려 하자 소군정이「인민위원회로의 정권 이양 주장」등 그에 대한 대응책을 남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에직접 지시한 사실 역시 새롭게 드러났다.
이같은 사실들은 당시 박헌영(朴憲永)이 이끈 남한의 좌익계열이 좌우합작에 반대하고 입법의원선거를 전면 거부한 배경을 밝혀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하다.
제1차 美.蘇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미군정은 난항에 빠진 한국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좌우합작이라는 새로운 정책을 추진했다.이는 남한에 소련측이 호감을 느낄 수 있는 세력을 등장시켜 이들로 하여금 남한의 정치적 통합을 주도하게 함으로써 장차 소련과의 협상을 원만히 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또 공산주의자들로부터온건좌파를 분리시킴으로써 공산주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의도도 함께 포함됐다.
한편 여운형의 측근이었던 이만규(李萬珪)는『여운형은 자신이 좌.우세력을 통합시켜야 한다는 개인적 사명 때문에 좌우합작에 참여했다』고 주장했다.그러나 여운형은 당시 좌파의 지도권을 놓고 박헌영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던 터에 미 군정으로부터좌우합작 추진 제안을 받자 박헌영을 고립시킬 수 있는 기회로 판단하고 이를 수락한 측면이 강했다.반면 김규식은『독립정부를 수립해보겠다는 의욕에서 좌우합작에 뛰어들었다』고 스스로의 입장을 밝혔다.
좌우합작운동은 46년 5월25일 좌.우익 지도자들간에 첫 회합을 가진 이래 여러 차례의 우여곡절을 겪기는 했지만,같은 해10월7일「좌우합작7원칙」이라는 합의점을 도출해 냈다.
지금까지 김일성(金日成)을 비롯한 북한지도부가 좌우합작에 반대한 것은 알려져왔다.그러나 소군정이 좌우합작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비망록』에 따르면 스티코프는 46년 9월24일 북한을 방문한 여운형에게 무슨 답변을 주어야 할지 스탈린의 지령을 요청했고,이틀 후 소군정 민정(民政)사령관인 로만넨코에게『남조선 좌우합작을 추진하지 말라』고 지시했다.소군정이 좌우합 작에 명백히 반대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소군정이 좌우합작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여운형에게 전달하기로 했으면서도 그에 대한 신뢰여부를 검토했다는 점이다.이는 여운형이 과연 그런 지시를 수용할지 소군정이 의문을가졌음을 의미한다.또 소군정이 여운형을 회유하기 위해 노력한 것을 보면 당시 여운형이 일방적으로 소군정의 지시를 받는 관계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비망록』은 좌우합작에 대한 소군정의 반대의사가 확고함에 따라 북한지도부도 좌우합작에 대해 부정적인 자세를 취했음을 확인시켜 준다.이같은 점은『김두봉(金枓奉)이 백남운(白南雲)에게 왜 좌우합작에 동조했으며,왜 북조선의 지시를 이행하 지 않느냐』고 힐문한 사실에서 드러난다.
실제로 좌우합작은 박헌영이 이끄는 남조선노동당측의 비타협적 태도와 폭력노선 추구,그리고 신탁통치문제및 토지문제로 인한 우익측의 좌우합작7원칙에 대한 거부로 실패하고 말았다.
한편『비망록』은 좌우합작세력의 정치적 입지를 제도적 차원에서보장하고 남한 행정에 한국인의 참여기반을 확대하기 위해 미군정이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을 수립하려 하자 소군정이「인민위원회로의 정권 이양」요구로 맞설 것을 남조선민주주의민족전 선에 지시한 사실을 처음 밝히고 있다.
또 입법의원 선거시 토지개혁과 조세개혁 등을 정치적 슬로건으로 내세울 것을 직접 지시한 점도 주목할만하다.당시 남한 좌익측은 미군정의 탄압을 이유로 선거에 불참했지만 10월폭동과 맞물린 선거기간(46년 10월21~31일)중 이런 구호를 줄곧 외쳐댔다.
입법의원 개원 직후 박헌영이『만일 50%의 의석을 준다면 입법의원에 들어가도 좋은지』를 소군정에 문의한 사실은 당시 남한좌익의 의사결정에 소군정이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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