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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왕 - 정조의 능행길을 따라서 ②

중앙일보

입력

길에서 위용을 뽐내고 축제를 펼치다

정조의 궁 밖 나들이 중에서도 흔히 ‘을묘원행(乙卯園幸)’이라고 불리는 1795년(정조19년)의 현륭원 방문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1975년은 어머니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가 회갑을 맞는 해로, 행차는 어머니 혜경궁의 회갑을 경축하기 위한 나들이였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살아있었더라면 함께 회갑 잔치를 올리는 해이기도 했으니 표면상으로는 명분이 서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정조는 화성에서 잔치를 벌인 뒤 6월 18일에 정식 회갑잔치를 서울의 연희당(延禧堂)에서 다시 치렀다. 이는 8일간의 화성행차가 단순히 회갑잔치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준다. 즉, 작게는 어머니의 한을 풀어 주기 위한 행차였지만, 크게 보면 자신이 왕위에 오른 지 20년이 다 되어 가는 시점에서 그간 쌓아 놓은 위업을 과시하고, 왕권을 확실히 펼쳐 보이려는 거대한 정치적 시위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일례로 수천 명의 병력과 인원이 동원되고, 막대한 재정이 소요되는 행행은 왕이 군수권과 재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지 않으면 실현되기 어려운 일이었다.
정조 최대의 정치적 행사로 꼽히는 을묘년의 화성행차, 그 8일간의 행적을 따라가 보자.

사진1. 『원행을묘정리의궤』 중 김홍도가 그린 「반차도」 일부

1795년 윤2월 9일, 창덕궁을 출발한 정조의 행렬은 7박 8일간의 공식 일정에 들어갔다. 당시 화성에서 있었던 7박 8일 간의 행사는 <원행을묘정리의궤>에 생생히 남아 있다.
정조의 화성 행차는 1794년 12월부터 준비가 시작되었다. 제일 먼저 행사를 주관할 정리소(整理所)를 설치하고, 행사 경비로 10만 냥을 마련하였는데 모두 정부의 환곡을 이용한 이자 수입이었다. 환갑을 맞은 혜경궁 홍씨가 장거리 여행을 할 수 있도록 가마 2채를 특별 제작한 것은 행차를 위한 시작에 불과했다. 가장 안전하고 가장 효율적으로 한강을 건널 수 있도록 배를 고안했으며, 1,800여명의 행렬이 이동할 수 있는 시흥로(오늘날의 1번국도)를 새로 건설했다. 행렬의 모습을 담은 반차도에 나타난 인원은 1,779명이나 현지에 미리 가 있거나 도로변에 대기하면서 근무한 자를 포함하면 6,000여 명에 이르는 엄청난 인원이었다.

사진2. 정조대왕 『능행도』 중 일부
정조가 1795년의 화성행차를 널리 후세에 알리기 위하여 궁중의 화원들로 하여금 행사의 주요장면을 그리게 하여 만든 병풍. 노량주교도섭도, 시흥환어행렬도, 득중정어사도, 서장대성조도, 낙남헌방방도, 화성성묘전배도, 낙남헌양로연도, 봉수당진찬도 등 능행차와 관련된 여덟 폭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첫째 날: 새벽에 창덕궁을 떠나다.
아침 묘정3각(卯正三刻, 6시 45분경)에 세 번째 북이 울리자 왕은 융복(戎服)을 입고 모자에 깃을 꽂고 뚜껑 없는 가마를 타고 돈화문에 나와 두 누이인 청연군주(淸衍君主)를 대동하여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기다렸다. 어가 행렬은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을 출발하여 돈녕부 앞길~파자전 돌다리(지금의 단성사 앞)~통운 돌다리(지금의 보신각 앞길)~대광통 돌다리(지금의 서린동 122번지 남쪽)~소광통 돌다리(남대문로1가 23번지 남쪽)~동현(銅峴, 지금의 명동)병문 앞길~송현(松峴, 지금의 한국은행 부근)~수각(水閣) 돌다리~숭례문(남대문)으로 이어지는 길을 거쳤다. 이 어가는 노량행궁(용양봉저정, 지금의 동작구 본동 30번지)에서 점심을 들고 휴식을 취한 후 오초2각(午初二刻, 11시30분)에 시흥행궁으로 향했다. 휴식 시간에 간식을 먹거나 정식 식사를 할 때에는 음식의 그릇 수, 들어간 재료와 음식의 높이, 밥상을 장식한 꽃의 숫자까지 표시하였다. 행차가 출발하는 시간을 알릴 때에는 꼭 세 차례에 걸쳐서 악기를 불었다고 한다.

-둘째 날: 시흥을 출발하여 청천평에서 휴식을 취하다.
시흥을 출발하여 지금의 시흥대로와 안양시 만안로, 그리고 1번 국도를 따라가는 길로 만안대로를 따라 남으로 가는 길은 언덕이 거의 없어 평탄했다. 장산모루를 지나 청천평(晴川坪)에 이르자 왕은 말에서 내려 혜경궁에게 문안을 드리고 휴식을 취한 후 사근참행궁에서 점심을 먹었다. 점심 무렵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는데도 정조는 길을 재촉했다. 그리고 이날 저녁 드디어 화성행궁에 도착하였다. 행렬이 화성의 장안문을 들어갈 때에 정조는 갑옷으로 갈아입고 군문(軍門)에 들어가는 절차를 취했다. 창덕궁에서 화성행궁까지의 거리는 정확하게 63리였고, 화성행궁에서 현륭원까지는 20리였다. 당시의 10리는 약 5.4Km에 해당한다.

-셋째 날: 아침에 화성 향교 대성전에 참배하다.
화성에서의 첫 행사를 향교 참배로 정하였다. 아침에 화성향교의 대성전에 가서 참배를 하고, 오전에는 낙남헌으로 돌아와 수원과 인근의 거주자를 대상으로 한 문·무과 별시를 거행하여 문과 5인, 무과 56인을 선발했다. 오후에는 행궁의 봉수당에서 회갑잔치의 예행연습인 진찬습의(進饌習儀)가 거행되었는데 여기에는 대신들 외에도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친척들까지 대거 초대했다.

-넷째 날: 아침에 현륭원에 전배하다.
이날은 오전에 아버지 묘소인 현륭원(顯隆園)에 참배를 하였다. 행차는 화성 남문인 팔달문으로 나와 지금의 정조로(正祖潞)를 따라 남으로 향했고, 현재 매교삼거리(梅橋三巨理)인 상류천점(上柳川店)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이어 정조는 참포(袍, 연한 청흑색 옷)로 갈아입고 장내(帳內)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 날 혜경궁 홍씨의 울음소리가 장 밖에까지 들렸다고 전해진다. 효성이 지극하였던 정조는 친히 어머니를 위로하였지만 본인 역시 슬픈 감회를 억누르기 힘들어했다. 이후 왕은 서장대에 친림하여 주간 및 야간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화성에 주둔시킨 5,000명의 친위부대가 동원된 이 날의 훈련은 정조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던 노론 벽파 세력에 대한 엄중한 경고의 메시지도 포함돼 있었다.

-다섯째 날: 오전에 봉수당에서 회갑잔치를 하다
이날은 행차의 하이라이트인 진찬례(進饌禮), 혜경궁 홍씨의 회갑잔치가 진정3각(辰正三刻, 오전 8시 45분경) 봉수당에서 거행되었다. 혜경궁의 자리는 행궁 내전의 북벽에 남쪽을 향해 마련됐고, 왕은 동쪽 자리에 앉았다. 혜경궁 자리에는 연꽃무늬 방석이 깔리고 뒤에는 십장생 병풍이 둘러 쳐졌으며 왕의 자리에는 표피방석과 진채병풍이 놓여졌다. 왕이 술잔을 올리고 치사를 드리자 혜경궁은 “전하와 더불어 경사를 함께 한다.”는 선지(宣旨)를 내리고 술을 마셨고 여민락과 천세만세곡이 연주되자 왕은 절하는 자세로 가서 경의를 표한 다음 천세(千歲), 천세, 천천세를 불렀다. 봉수당에서 거행된 잔치에는 궁중 무용인 선유악이 공연되었고, 의식의 진행 절차, 잔치에 참가한 여자 손님 13명과 남자 손님 69명의 명단, 잔치에 쓰일 춤과 음악, 손님에게 제공되는 상의 숫자와 음식이 준비된 상황이 낱낱이 기록되었다.

-여섯째 날: 새벽에 화성주민에게 쌀을 나누어 주다.
새벽에 신풍루(新豊樓)에서 화성부의 홀아비, 과부, 고아, 독자인 사민(四民)과 가난한 사람인 진민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다. 진정1각(辰正一刻, 8시 15분경)에는 낙남헌(洛南軒)에서 양로연을 베풀었다. 양로연에는 화성의 노인 384명이 참가하였는데, 이날 노인들의 밥상과 왕의 밥상에는 차별이 없이 모든 같은 음식이 올랐다고 한다.

-일곱째 날: 귀경길에 오르다
한양으로 돌아오는 길은 내려올 때와 같았다. 사근참행궁에서 점심을 들고 시흥행궁에서 하룻밤을 자는 것이 이 날의 일정이었다. 진정3각(辰正三刻, 오전 8시 45분경)3취에 왕은 군복을 입고 출발하여 미륵현(彌勒峴, 지지대고개)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오늘날 수원시와 의왕시의 경계선에 해당하는데 이 고개를 넘으면 화성은 물론 아버지 무덤인 현륭원이 보이지 않게 된다. 이에 왕은 “이곳이 오면 떠나기 싫어 나도 모르게 방황하게 되니 이곳을 지지(遲遲)라고 이름 지으라”고 했다. 이때부터 이 고개를 지지대 고개로 부르게 되었고 지금도 그 유래를 적은 비각(碑閣)이 서 있다.

-여덟째 날: 시흥에서 백성들과 대화를 나누다
이 날 아침 왕은 시흥행궁을 떠나 궁에 돌아가기에 앞서 백성들을 직접 만나 민생의 질고(疾苦)를 듣고자 묘정3각(卯正三刻時, 오전 6시 45분경)에 부로(父老)와 민인(民人)을 만나 백성들의 소망을 듣고 이 자리에서 환곡을 탕감해 주기도 했다. 노량 용양봉저정에서 점심을 들고 한강의 배다리를 건너서 저녁에 창덕궁으로 돌아옴으로써 8일간의 장엄한 효행의 화성 어가행차가 막을 내렸다.

자료 및 사진=수원문화원

객원기자 최경애 doongjee@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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