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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밀서, 독일 황제에 전달 안 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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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고종 황제가 을사늑약(1905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체결된 조약)의 원천 무효를 호소하며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사진)에게 보낸 밀서(본지 2월 20일자 1면)는 외무부 실무 담당자 선에서 묵살돼 황제에게 전달되지 못한 것으로 20일 밝혀졌다.

이 같은 사실은 국사편찬위원회가 2003년 독일 정치문서보관소에서 복사해온 한국 관련 외교문서(Die Koreanische Frage)를 통해 확인됐다. 1906년 6월 6일 작성된 독일 외무부 중앙국 보고서 형식의 이 문서는 친서가 어떻게 처리됐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고종 친서를 연구해온 서울대 이태진(국사학)교수는 “지금까지 친서의 사후처리 과정에 대해 추정 해석만 할 수 있었는데 이 보고서는 친서외교가 어떤 이유로 좌절됐는지 보여준다는 점에서 연구자료로서 가치가 높다”고 평가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독일 외무부 중앙국의 정보 담당관리는 1906년 5월 27일 고종의 친서를 받았다. 고종의 정무 고문이었던 프랑스인 트레믈러는 베를린 주재 프랑스대사관을 통해 외무부에 친서를 접수시켰다. ‘대덕국(大德國·독일)대황제 폐하’라고 적힌 봉투 안에는 어새(御璽·옥새의 높임말)가 찍힌 친서 외에도 ‘전 황실 광무(광산업무)검찰관 겸임 광학국 감독’이라는 트레믈러의 신분을 확인하는 문서도 있었다.

보고서는 ▶주베를린 대한제국 공관이 폐쇄되고 ▶(이로 인해) 조선 황제의 요청에 답변할 수 없는 상황이므로 빌헬름 2세에게 보고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고 기술했다. 을사늑약으로 인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면서 해외 공관이 폐쇄됐기 때문에 빌헬름 2세의 답변이 나온다 하더라도 전할 방법이 없다는 논리다.

외교부 관계자는 “외교사절이 갖고 온 국가 정상의 친서를 실무자 선에서 묵살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라며 “명목상 독립국가였던 대한제국의 위상과 당시의 대외 정세 등을 종합 판단해 결정을 내린 것 같다”고 말했다.

이 자료를 번역한 명지대 정상수(독일사) 교수는“을사늑약의 결과로 해외 공관이 폐쇄되는 바람에 을사늑약의 원인무효를 주장하는 친서가 빌헬름 2세에게 전달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망국의 비극을 더한다”고 말했다.

독일 외무부 보고서 전문

“ 한국 황실의 자문관 트레믈러가 가져온 문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본국 황제에게 전달하려는 5월 27일 대한제국 황제의 편지는 대한제국의 독립을 보장해줄 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2. 대한제국 황제의 교시는 이전에 베를린에 주재하고 있는 대한제국 공관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현재 트레믈러가 베를린을 떠나 더 이상 주소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대한제국 황제의 요청에 답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상부에, 특히 본국 황제에게 보고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 트레믈러가 이미 개인적으로 우리 외무부를 방문해 구두로 말한 바 있듯이 우리 측의 즉각적인 대답이 요구되는 사안은 아니다. 외무부 중앙국.”

정용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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