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재 기자의 웰컴 투 풋 볼 <38> 손등에 적은 각오 발등에 새긴 야망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3면

한송이(24)는 여자 프로배구 도로공사에서 뛰고 있는 선수다. 언니 한유미(26·현대건설)와 자매 대결을 벌일 때면 늘 화제에 오른다. 1m85㎝의 좋은 신장을 지녔지만 언니(1m79㎝)만큼 야무진 플레이를 보여주지는 못했다. 한유미가 국가대표로 활약하는 동안 ‘유미의 동생’으로 곁을 지켰을 뿐이다.

그러던 한송이가 달라졌다. 지난달부터 경기에 나설 때마다 손등에 ‘30득점 미스 NO’라고 쓴다. ‘한 경기에 30점을 올리고, 실수는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공격에 실패하거나 어처구니없는 플레이를 한 뒤에는 손등의 글자를 한 번 더 보고 정신을 다잡는다고 했다. 그 덕분일까. 한송이는 요즘 한 경기에 30점 이상을 올리는 경우가 많아졌다. 득점 순위도 김연경(흥국생명·136점)에 이어 2위(113점)고, 후위 공격(1위) 등 공격 대부분의 분야에서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사실 손등에 글씨를 쓰는 것은 현대건설 선수들이 먼저 시작했다. 그렇지만 이들이 쓴 ‘레츠 윈(Let’s win)’ ‘크레이지 모드(crazy mode)’ 같은 문구는 한송이에 비해 ‘구체성’이 떨어졌다.

축구에서 ‘주문(呪文)식 글씨 쓰기’의 원조는 인천 유나이티드 장외룡 감독이 아닐까 싶다. 그는 2005년 인천 감독을 맡으면서 흰색 푸마 모자에 자신의 좌우명인 ‘忍耐(인내) 努力(노력) 犧牲(희생)’이라는 글자를 썼다. 선수단 숙소에도 팀 포진도를 크게 그려 붙인 뒤 ‘Never give up(절대 포기하지 말자)’ ‘서로를 믿어야 합니다’라는 글씨를 써 넣기도 했다.

인천이 전지훈련 중인 괌에 찾아갔더니 장 감독은 또 한번의 ‘진화’를 하고 있었다. 축구화에도 뭔가를 써넣은 것이다. 오른쪽에는 좌우명을, 왼쪽에는 ‘GOAL is 2012→2014’라고 썼다. ‘2012년 올림픽대표팀을 맡고, 2014년 월드컵 때는 한국대표팀을 이끌고 싶다’는 야망을 새긴 것이다.

장 감독은 일본에 건너가면서 메모의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한다. 1989년 일본 실업팀에 진출했는데 축구단의 모기업이 인재 교육 사업을 하는 곳이었다. 당시 사장은 장 감독에게 “목표가 명확할 때 성공 확률이 높아진다. 구체적인 일정표를 만들어 보이는 곳에 두라”고 늘 강조했다고 한다.

새해를 맞은 지도 40일이 지났고, 음력 새해도 시작됐다. 정초에 세웠던 목표가 흐물흐물해지는 걸 느낀다면 다시 정리해 크게 써 붙여 놓자. 막연하게 ‘금연’이라고 할 게 아니라 ‘하루 세 개비 이상 피우면 야근을 대신해 준다’고 동료에게 공포하거나, 그냥 ‘운동하자’가 아니라 ‘2월 말까지 체중을 몇 ㎏으로 줄이자’는 식으로. 

정영재 축구팀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