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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왕사신기’ 엉뚱 촌장 오광록의 뜻밖의 인생 고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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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중앙 나와 다른 향과 색깔. 낯설다는 건 신선하다는 거다. 그 신선함은 외면을 받기도, 반대로 열렬한 호응을 부르기도 한다. 낯설음을 무기로 관심을 이끌어내는 사람들이 있는데,
배우 오광록이 그렇다.

지금까지 알려진 오광록(46)은 ‘시인이자 농부’다. 북한산 자락 서울 성북동의 언덕배기 집에서 텃밭을 일군 지 햇수로 7년 차. 오롯이 도시에서 자란 그는 꾀꾀로 농부가 된다. 텃밭에서 나오는 채소들은 유기농이라는 자랑이다. 중학교 때 시인을 꿈꿨고, 비만 오면 시작 노트를 챙겨 학교 대신 경춘선을 타는 것으로 부모 속을 태웠으며, 현재까지 원고지 무게 20kg 정도의 시를 쓴 것 같다고 했다.

그만의 독특한 억양으로 뱉어내는 대답들은 시인지, 인터뷰인지 헷갈릴 정도다. 가능한 한 고운 단어를 엄선하는 그는 끌끌한 사람이었다. 오광록은 꽤나 예민한 기억력을 갖고 있었고, 소중한 인생사와 더불어 굳이 감춰도 무방할 상처 입었던 기억들을, 즐겨 쓰는 표현대로 ‘내추럴하게’ 들려줬다.

최근 MBC TV‘태왕사신기’의 ‘엉뚱 촌장’, 흥행작 ‘세븐데이즈’의 조폭 역할을 성공리에 마친 그는 기자에게 기습을 가하는 것으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그런데, 내가 먼저 하나 물읍시다. 왜 나를 만나려고 한 건지….”

태왕사신기 인기 몰이 후, 그와의 내추럴 토크… 오광록은 역할 몰입을 끝내고 숨을 가다듬는 요즘의 시간들을 이렇게 표현했다. “더 깊어져야죠. 작품 활동을 하면서 날카롭고 예민하고 닳았으니, 이젠 한갓진 시간이 됐으니까, 내 안의 원석을 또 발견하고 소중하게 만날 시간인 거죠.” 오광록의 관조적 시선과 골라낸 단어들은 세상(현실)과의 거리를 한껏 벌리는 중이었다. 독특하다는, 그래서 기인 같다는 소리를, 살아오는 동안 자주 듣지 않았을까.

“20대의 시간들이 그랬죠. 시를 쓰고, 시와 보낸 시간들이 많으니까요. 살아오면서 시를 놓은 적은 없어요.” 오광록은 고등학교 시절, 비가 내리면 경춘선 기차를 타는 ‘일탈’로 34일 연속 결석 기록을 세운 바 있다. 당시는 장마철이었으므로.

“시는 젊었을 때 많이 썼으니까, 그땐 치열했고 삶에 대한 끊임없는 궁금증이 있었을 때고… 음, 그때를 생각하면 요즘도 가슴이 콩닥거리네요. 너무나 말간 순간들이 있었죠. 세월이 차면서 영혼에 물때가 끼듯이, 찌꺼기들이 생겨나요. 요즘은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싶고, 조금 더 신비로웠으면 하는 중이죠.”

분리 수거 대상인 쓰레기는 “무반응할 것들에 대해 반응하고 말았던 자신”이라고 했고, 세상에서 가장 혐오하는 건 “자기밖에 모르는 XX들과 내추럴한 것들을 방해하는 정치나 제도들”이라고 했다.

오광록은 분명 그렇게 말했고, 그 속에서 애착을 갖는 것과 살아가는 방식들에 대해 말을 이었다. “뭔가 아름다우려면 여백이 있어야죠. 이것 아니면 저것이란 이분법은 참 유치하지 않나요. 그런 말 하는 사람들이 어디까지 가봤기에 답을 안다고 떠드는 것일까. ‘사이’(간격)가 없으면 바람이 불고 새가 오겠어요. 사이가 있어야 새가 날개를 활짝 펴고 비행을 하는 건데….”

오광록을 울린 가난과 이혼… “그런데, 요즘 인간관계는 오히려 촘촘하지 못해서 아쉽고 외롭지 않습니까.” 기자는 호응 대신 딴지를 걸었다. 그는 잠시 먼 곳을 응시하다 뜻밖의 상처 입은 기억을 토해냈다.

“난 한 여인과 만남과 이별(이혼)을 거쳤고, 그 사이에 아들이 하나 있지요. 이름이 ‘시원’인데, 인생 시원하게 살라고 붙여준 이름이죠. 음, 이별이라…. 젊은 시절(20대) 만나 서른 중반에 헤어졌죠. 그와 나 사이에 어려운 시절이 있었는데, 선배들이 들려준 얘기처럼, 가난이 앞문으로 들어오면 사랑이 뒷문으로 나간다는, 낙숫물에 바위가 깨지고 금이 가듯이, 그렇게 평화가 없는 자유는 너무 쓸쓸했죠. 노력해도 풀어낼 수 없는 바닥(가난)의 시간들이 그때였고, 그게 쌓이니 소통이 부재해졌죠.”

가난이 죄라면, 요즘이면 다시 뭉쳐도 되지 않냐고, 기자는 ‘툭’ 하며 그를 건드리고 말았다. “삶은 흘러가는 거니까요. 서로 평화가 있는 자유를 얻은 상태니까, 그렇지는 못 하겠지만, 분명한 건 그녀는 내 평생의 친구란 거죠.”
아들은 그 이름처럼 살아가는 중인지….

“엄마와 함께 살죠. 지금 사춘기를 겪는 중이에요. 아빠의 어린 친구가 어느새 사춘기를 겪다니…. 그 나이까지 많이 부딪혔고, 지금은 사춘기 몸살의 2/3는 지난 것 같아 다행이죠. 그래도 아빠 입장에선 미안해요. 어쩔 수 없는 ‘부재의 시간’을 보낸 것에 대해 할 말이 없죠.”

요즘은 ‘부재의 시간들’을 잘 메워가는 중인지도 궁금했다. “음, ‘소통’하며 살지요(웃음). 인생은 머나먼 길이고, 우린 엮인 관계잖아요. 앞으로 겪고 부딪히며 알아야 할 것들이 많죠. 아들과는 ‘툭’‘툭’, 그런 식으로 봐요. ‘사이’를 좁히고 싶어 아빠랑 좋은 친구 되자, 주변 사람에게 잘 해라, 그래야 소중한 네가 사람이 된다는 말을 종종 들려주죠. 사람한테 잘 하란 말은 무대(연극)에서 배운 건데, 상대 배우에게 좋은 호흡을 주면 난 춤을 추게 되거든요. 그렇게 어우러져 사는 삶이 소중하니까요.”

성북동 텃밭 가꾸는 농부의 시간 속으로… 오광록은 친구들을 ‘동지’라 부른다. ‘동지’의 조건을 묻자 “야생, 내추럴을 사랑하고 ‘푸른 저항’을 갖고 있는 독립군”이란 설명. 그 독립군의 숫자를 묻자 “의외로 많다”는 대답이다. 오광록 어록에 포함될 법한 ‘푸른 저항’에 대한 설명을 부탁했다.

“나무가 푸르고, 하늘이 푸르고, 그 ‘푸름’을 잃지 않기 위해 경계하며 살자는 거죠. 제도권에 삶을 가두지 말고 자꾸 깨우자는 의미죠.” 야생성과 내추럴리즘, 저항까지…. 얼마나 혹하는 단어들인가. 그런데 현실은 조직원(샐러리맨)을 그렇게 놔두지 않는다고 하자, “제도에 맞추다 보면 자신의 소중한 것들을 잃어가게 된다. TV, 인터넷 등으로 도피하고, 외져가지 말고 자연을 더 사랑하고 살면 된다”고 했다.

“도시에도 영락없이 해는 뜨고 달은 기울지 않나요”를 되묻는 배우 오광록의 또 다른 직함이 바로 농부다. 그의 집은 텃밭이 딸린 서울의 성북동. 성북동은 알려진 바 부자 동네가 아니냐고 묻는 것으로 오광록식 자연주의를 탐구했다.

“성 같은 집들이 있고, 마을버스가 힘겹게 오르는 산동네도 있지요. 우리 집은 후자인데, 경치는 참 좋아요. 지금까지 월세로 버텼는데, 이젠 전세로 갈아탈 때지(웃음). 올가을엔 동치미와 갓김치, 배추 등 세 가지를 수확했어요. 비료를 팍팍 주는 농사가 아니라 천천히 자라는 편이고, (수확물이) 많지 않아요. 그래도 나눠 먹는 즐거움이 크죠. 봄이면 스무 가지 쌈채를 해서 동지들을 초대해요. 첫 농사를 지을 땐 저 조그만 ‘씨’가 어찌 무가 될까, 참으로 신기했는데…. 다음엔 땅을 더 깊게 일구게 되고, 그렇게 7년째가 됐어요.”
자연을 사랑하는 농부의 딜레마 하나.

“놀랍게도, 텃밭에 메뚜기가 살아요. 그런데 농사 욕심이 커져 밭을 자주, 깊게 일구니까, 흙 속의 메뚜기 유충들이 몸살이 나 자꾸 그 수가 줄어드네요. 그런 건 안타깝죠.”

연기판의 독립군으로 산다는 것… 오광록의 특이한 행보를 쫓다 보니, 본업인 배우 얘기를 지나칠 뻔했다. 지난 82년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으로 데뷔한 후 무대에 올인하다 35살이란 뒤늦은 나이에 다소 무거운 주제의 영화 ‘눈 감으면 보이는 세상’으로 데뷔했다. 이후 차곡차곡 쌓아 놓은 작품들은 20여 편을 넘어섰다. 놀라운 건, ‘올드보이’(자살 남), ‘친절한 금자씨’(유괴된 아이 부모 역), ‘잠복근무’(사이코 보스), ‘세븐데이즈’(의리파 조폭) 등 흥행작들에 참여율이 높다는 점이고(우정, 특별 출연 포함), 의외인 건 상업주의 영화들에 잘도 적응했다는 것이었다. 먼저, 왜 흥행작들이 배우 오광록을 필요로 하는 걸까란 질문에 대한 답부터.

“(잠시 생각) 그건 ‘낯설음’이라 표현하고 싶네요. 무심히 지나갈 수 있는 것에 대한 낯선 터치가 있어서, 참 좋은 거 아닌가요.”

다음으로 작가주의 vs 상업 영화를 두고 고민이 많았을 법한 배우 중 한 명으로서 어떻게 적응해 왔나를 물었다.

“잠복근무가 날 괴롭힌 영화였죠. 영화에 출연하지 않으려고 이런 저런 핑계를 댔고, ‘특별 출연’이란 단서 조항을 달았고, 가능한 한 대사를 쳐 내겠다는 조건을 내걸었죠. 그런데 감독이 흔쾌히 받아들이는 겁니다(웃음). 사실 당시 내가 무척 어려울 때였죠. 마치 거제도 포로 수용소의 부상병 같았던 시절이랄까. 당시 내가 달러 빚(사채 빚)을 얻어 쫓기는 걸 알고 한 분이 그 빚을 갚아 주기 위해 오광록을 캐스팅한 거였어요. 난 그 분을 ‘천사’라고 부르지. 그게 (상업 영화에 출연한) 가장 결정적인 대목이죠(웃음). 그래, 해야겠다, 독립군처럼 하리라, 결심한 거예요.”

거대 매니지먼트 회사 싸이더스 HQ 소속인 그는 그 때문에 “독립군과 거대 자본이 어울리는가”란 오해를 사기도 했다. 이에 대해 그는 “난 방해를 받고 일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독립군 행보는) 무방하다”고 분명히 했다. 빛나는 조연, 시인이자 농부, 그리고 독립군. 한 가지 이름으로 정형화시킬 수 없는 오광록과의 만남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질문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굵고 느리면서 운율 있는 목소리 내는 비법이 무엇인지….
“내추럴하게 살아야죠. 시집을 읽고 자신에 대한 글을 써 봐야죠. 자기 생각을 글로 써 보면 그게 (말하는) 호흡이 되는 거죠. 음색엔 삶의 색깔이 묻어납니다. 모든 건 자기의 창을 통해 나오는 거란 걸 알아야 되는 거고, 음, 나도 더 성숙해져야 할 텐데….”

취재_강승민 여성중앙 기자 사진_임효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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