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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해의 달인? 난 바다 몰라 … 바다는 인간 너머 존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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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외롭고 고달픈 마도로스 인생이지만 귀항은 늘 즐겁다. 한 달 만에 집에 들를 생각에 강 선장이 접안을 앞두고 모처럼 활짝 웃고 있다. [사진=송봉근 기자]

지난달 21일 항도 부산. 대한(大寒) 값을 하느라 중부·영동지방엔 폭설이 내리고 있었지만 이곳에는 추적추적 겨울비가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이따금 비릿한 바닷내음을 실은 바람이 제법 옷깃을 파고드는데 중구 중앙동 길거리에서 만난 세 명의 사나이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연신 파안대소를 주고받는다. 어둑한 불빛 아래서도 희끗희끗한 머리 하며 적당히 팬 주름으로 미뤄 환갑쯤 돼 보이는 이들은 이내 발길을 옮겨 근처의 한 술집에 자리를 잡는다. 소주와 맥주, 양주가 뒤섞여 일고여덟 순배쯤 되자 한 명이 자청해 1939년 백년설이 불러 히트했던 ‘마도로스 수기’를 뽑는다. 제법 구성진 가락의 1절이 끝나자 누구라 할 것 없이 죄다 간주(間奏)와 함께 내레이션을 외쳐댄다.

“이봐 여자 술을 다오. 내 심장을 화산처럼 타오르게 할 독한 술을 가져와 따르란 말이야. 바다의 사나이는 바다에서 태어나 바다와 싸우다 바다에서 죽을 목숨, 두려울 게 무어냐 말이더냐. 으하하하-. 번개냐, 파도냐, 자-보아라. 내 구리 빛 팔뚝을 보란 말이야. 나는 바다의 풍운아 마도로스란 말이야. 으하하하-.”

이후에도 노래는 계속 됐다. ‘마도로스 박’‘잘 있거라 부산항’ ‘아메리칸 마도로스’ ‘등대불사랑’ ‘무정한 마도로스’ ‘마도로스 도돔바’ ‘쌍고동 우는 항구’ ‘마도로스 부기우기’ ‘멋쟁이 마도로스’….

짐작했겠지만 이날 자리는 호주에서 무연탄을 싣고 한 달 만인 8일 귀국한 대한해운(KLC)소속 강대기(60) 선임선장을 위로하기 위해 역시 선장 일을 하는 친구들이 마련한 것. 1968년 국립 목포해양전문대(2년제·현 목포해양대)를 졸업한 이래 41년째 배를 타고 있는 베테랑 마도로스들이지만 소속사와 타는 배들이 달라 한꺼번에 만나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 판에 모처럼 자리를 함께했으니 회포를 푸는 방식 또한 ‘왕년의 마도로스’풍일 수밖에. 어쩌면 ‘낭만파 마도로스’의 마지막 세대일 이들의 만남은 그래서 당연히 새벽까지 이어졌다.

강 선장은 원래 전북 익산 사람이다. 20마지기 농사꾼 집안의 4남3녀중 장남인 그는 강경에서 중학교를 마친 뒤 주위의 권유로 당시 5년제인 목포해양고등전문학교 항해과에 들어간 것이 오늘까지 이어진 ‘바다 인생’의 출발이었다.

“국립 선원양성학교라 수업료가 없고 재워주고 먹여주는데다 당시엔 마도로스만큼 멋진 직업도 없었거든요.”

요즘이야 소나 말이나 비행기를 타고 해외나들이를 밥 먹듯이 하지만 사실 70년대 말까지만 해도 해외 바람을 쐬는데 외항 선원만한 것도 없었다. 더구나 산업이 별 볼 일 없었던 터라 수입이란 면에서도 그만이었다. 물론 배를 탄다는 게 거칠고 외로운 일이기는 하지만 학교를 갓 졸업한 3등 항해사만 해도 수입이 당시 5급 공무원 봉급의 대여섯 배는 족히 됐다.

“특히 외화벌이를 위해 국가에서도 선원양성을 적극 지원해 주문진·포항·완도·여수·인천 등의 수산고에선 어선항해사를, 부산해양대와 해양고, 목포해양고등전문 등에선 상선항해사를 키우도록 했습니다.”

강 선장은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울산에서 부산 감천화력발전소까지 벙커C유를 운반하는 1800t짜리 제3민우호의 3등 항해사로 선원생활을 시작했다. 진짜 마도로스가 된 것은 70년 일본 니가타에서 부산 동명목재까지 메탄올을 나르는 화학물전용선 동성호(480t)를 타면서부터.(원래 마도로스란 선원을 뜻하는 네덜란드어 ‘마트로스(matroos)’에서 나온 말로 일본을 거치면서 오늘날처럼 발음이 변했는데 국어사전에서도 주로 외항선원을 이르는 외래어로 통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해 그는 난생 처음 사선(死線)을 넘나드는 모험을 감행하기도 했다. 월남전이 한창이던 사이공에서 메콩강을 따라 캄보디아 프놈펜까지 항공유를 수송하는 배를 탔던 것. 야음을 이용한 항행이었지만 기관총과 로켓포로 무장한 베트콩의 공격을 받아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다.

“당시 5급 공무원 월급이 1만2000원 정도였는데 1급 항해사로 월 380달러씩 받았으니 스무 배쯤 됐죠. 하지만 언제 죽을지 모르는 판에 돈이 대숩니까. 결국, 7개월 만에 때려치우고 다른 배를 탔죠.”

그가 드디어 선장이 된 것은 승선 8년 만인 75년 5월. 현대조선 초창기 일본 요코하마에서 기자재를 들여오는 일반화물선 ‘시 베어(Sea Bear)’에서였다. 그 후 29년째 선장으로서 각종, 각급 배(대략 50여 척)의 운항을 책임지면서 눈부신 활약을 해오고 있다.

“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참 폼 났습니다. 들르는 항구마다 휩쓸고 다니고 돈도 뿌리고 다니다시피했으니까요.”

강 선장이 84년부터 몸을 담고 있는 대한해운은 현재 26척의 선박을 보유, 287만t의 선복량을 자랑하는 국내 최대 규모의 에너지·자원 전문수송선사로서 세계적으로는 11위. 강 선장은 87년부터 이른바 ‘광탄선(광석과 석탄수송 전용선)’을 담당하고 있는데 브라질·칠레·인도·호주 등을 주무대로 포스코와 한전 등에 물건을 대오고 있다.

강 선장이 지금까지 들른 나라는 줄잡아 50여 개 국가. 항해의 특성상 내륙 국가들과는 접촉 기회가 없는 점을 감안하면 웬만한 국가는 다 섭렵한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금까지 항행사고는 물론 단 한 건의 결함지적도 받아본 적이 없을 정도다. 이 덕분에 2003년 8월 제1회 ‘올해의 선원’으로 선정돼 해양수산부 장관 표창을 받기도 했다. 강 선장의 이 같은 영광은 저절로 얻어진 게 절대 아니다. 그는 대한해운 3명의 선임선장 중 한 사람이다. 흔히 선장을 영어로 ‘캡틴(Captain)’으로 알고 있지만 해운업계에서 통용되는 용어는 ‘마스터(Master)’로 선임선장은 그야말로 ‘Master of the Master’이다. 다시 말해 어떤 배든 운용이 가능한 ‘항해의 달인’이란 얘기다. 그래서 그에겐 고정으로 운항하는 배가 없다. 장기운항 뒤 대부분 선장이 휴가를 가기 때문에 대신 배를 몰곤 한다. 그래도 그는 ‘완벽’하게 해낸다.

“항공기도 그렇지만 선박의 경우도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 셋째도 안전입니다. 그런데 안전이 확보되려면 기계, 사람, 바다 이 세 가지 함수풀이가 제대로 돼야 해요. 아무리 첨단기계라도 점검이 소홀하면 탈이 나게 마련이고, 선원 간 인화가 안 되면 사고가 터지고, 바다의 표정을 제대로 읽지 못하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요.”

강 선장은 어떻게해서든지 선원들을 챙기려 애쓴다. 요즈음 아무리 수영장이다 노래방이다 헬스클럽이다 해서 옛날보다 선내시설 등 복지(모르스 전보 대신 이메일, 위성전화도 가능하다)가 좋아졌다고 해도 역시 배를 타는 일은 힘들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그는 요즘도 1년이면 9개월가량 배에서 생활한다. 10여 년 전엔 한 번 탔다 하면 2~3년 만에 집에 들르곤 했었다. 그러다 보니 명절이고 결혼기념일이고 제대로 지내본 기억이 없다. 두 아들도 태어난 지 한참만에야 보았다. 그래서 노모(81)를 모시는 부인(55·B병원 간호과장)에게 늘 미안할 뿐이다. 이번에도 한 달 휴가라지만 설을 못 쇠고 호주로 떠나야 할 판이다.

“왕복으로 쳐서 호주는 한 달, 중동지역은 40일, 브라질은 100일쯤 걸립니다. 하지만 이번에 가는 실버벨호(11만325t)도 동대문운동장보다 세 배는 더 큰데 선원은 고작 스무 명입니다. 정말 가족이죠.”

강 선장은 키를 잡을 때는 호랑이지만 평소엔 수더분한 아저씨요, 자상한 형님이다. 항해 중엔 안전 때문에 하루 맥주 1캔씩밖에 허용하지 않는 탓에 일단 앵커를 내리면 ‘가족’들을 인솔해 객고 풀이도 해주곤 한다. 여태껏 조그만 선상 분란 한 번 없었던 비결이다. 하지만 그는 후배들이 예전보다 ‘마도로스 정신’이 약해진 게 못내 섭섭하다. 사나이다운 호기도 그렇지만 무역의 역군, 민간외교사절이란 자긍심이 영 부실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선장의 정년은 만 62세이다. 하지만 그는 사정이 허락하는 한 촉탁으로라도 계속할 작정이다. 이미 ‘배 나라의 왕’인 선장이었음에도 단지 배를 탄다는 이유로 장모가 반대해 4년 만에 결혼을 하기도 했지만 그는 결코 지금의 자신을 후회해본 적이 없다. 그만큼 배에, 바다에 인이 박였다. 그는 누구보다도 바다를 잘 안다. 하지만 그는 정작 하나도 모른다고 고백한다. 인간의 이해범위 저 너머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러면서 태안 앞바다 기름유출사고에 대해 던지는 한마디가 그답다.

“실수이겠지만 너무 했어요. 바다가 보고 있잖아요. 인간은 역시 미물입니다.”

글=이만훈 인터뷰 전문기자 , 사진=송봉근 기자

강대기 선장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전북 익산에서 20여 마지기 농사꾼 집안의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 68년 목포해양고등전문학교(2회)를 졸업한 이후 지금까지 50여 척의 각종, 각급(t) 선박과 함께 바다를 누볐다. 75년 ‘시 베어(Sea Bear)’호의 선장을 시작으로 선장만 29년째인 마도로스 중에서도 ‘왕 마도로스’이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웬만한 원양선원치고 그를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다. 지금까지 들른 나라만 줄잡아 50여 개 국가. 무사고 항행으로 2003년 제1회 ‘올해의 선원’으로 선정돼 해양수산부 장관 표창을 받기도 했다. 3년전부터 어떤 배든 운항할 수 있는 선임선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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