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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고시생 / 공무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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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1 대 100’이라는 TV 퀴즈 프로가 있다. 1명의 출연자가 100명의 집단과 함께 단계별로 문제를 푼다. 상식을 묻거나 허를 찌르는 질문이 많다. 전문 지식보다는 관심사가 폭넓고 심리싸움에 능한 출연자들이 유리하다. 최근 이 프로가 고시 합격자 특집을 방송했다. 1인의 일반 출연자와 함께 싸울 100명의 패널로 2007년 사법시험·행정고시 합격자 50명씩을 초대한 것이다. 결과는, 프로의 성격 탓이겠지만 ‘고시생의 망신’이었다.

이현세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에 나오는 인물(‘마동탁’)을 묻는 3단계 질문에서 고시 합격생 패널 중 무려 39명이 탈락했다. ‘공포의 외인구단’이라면 2000년대 초까지 재출간된 베스트셀러다. 2라운드는 더했다. ‘임금이 세상을 떠남’을 뜻하는 단어(‘붕어’)를 묻는 2단계에서 22명이 떨어졌다. 다른 보기는 ‘잉어’ ‘숭어’였다. 복식 경기 중 파트너와 교대로 쳐야 하는 것(‘탁구’)를 묻는 질문에도 17명이 탈락했다. 우리 말 ‘역전앞’처럼 동의어가 반복된 단어가 아닌 것(‘피아렌차광장’)이라는 4단계 질문에서도 26명이 오답을 내놨다. 다른 보기는 ‘몽블랑산’ ‘퐁네프다리’였다.

박효규 PD는 “프로의 성격상 한 우물만 판 고시생이 불리하리라 예상했었다”며 “사실 이것저것 관심사가 다양해서는 그 어려운 고시에 붙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고시 합격생이라면 우리나라 최고 엘리트 집단이다. 국가 경쟁력을 책임질 미래의 관료들이다. 아무리 재미로 하는 퀴즈쇼고, 고시에는 전문 지식이 중요하다지만, 편히 웃어넘기기 힘든 이유다. 드라마 속 고시생 이미지가 떠오르기도 한다. 전문 서적에 파묻혀 청춘을 저당잡히고 합격하는 순간 ‘신분 상승, 권력의 길’로 보상받는 듯한 이미지 말이다. 최근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보고에서 한 공무원이 “우리는 영혼이 없는 존재”라고 했던 말도 떠오른다.

때마침 일본에서는 공무원 개혁이 한창이다. 우리의 행정고시에 해당하는 국가공무원 1종 시험을 폐지하고, 10년 안에 민간인 전문가를 전체 공무원의 40%로 확대하는 법안을 준비 중이다. 지금처럼 시험만 통과하면 직업관료로 분류돼 업무 성과와 크게 관계없이 고위직으로 승진하는 시스템이 공직사회 경쟁력 약화의 주범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젊은날에는 어려운 시험에 매달리느라 세상사를 등지고, 합격 후에는 사실상 경쟁 무풍지대에서 보신하는 ‘철밥통’의 폐해. 더구나 세상은 아찔한 속도로 급변하며 창의적 리더십을 요구하는데 말이다.

양성희 문화스포츠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