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의 음식, 홍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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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호 25면

홍어를 처음 먹었을 때가 기억난다. 인사동의 ‘지리산’이라는 술집이었고, 선배 시인들은 막걸리를 들이켜고 있었다. 햇살이 적당히 따스한 오후였으니, 이십대 중반의 어느 가을날이었던 것 같다. 그때까지 나는 홍어란 고기에 대해 알지 못했으므로 선배들이 권하는 대로 그냥 젓가락으로 한입 삼켰다. 순간 나는 전교생이 이용하는 변소를 통째로 삼킨 듯한, 압도적인 느낌을 받았다. 인간이 왜 그런 음식을 먹어야만 하는 것일까? 사흘 동안, 입 안에서 가시지 않는 그 암모니아 냄새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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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취미도 그런 악취미가 없었다. 물론 이건 다 경상도 산골 출신의 시식 소감이고, 나중에 여러 일을 겪다 보니까 인간은 왜 홍어 같은 음식을 먹어야만 하는가라는 의문은 어느 정도 풀렸다. 그러니까 불길에 달려들어 죽어버리는 부나방의 욕망 같은 것이다. 인간들은 죽는 길이라는 걸 알면서도 곧잘 그런 길을 향해서 질주하기도 한다. 왜 홍어를 먹어야만 하는가라는 의문은 이내 왜 인간은 욕망에서 헤어나지 못하는가라는 의문으로 바뀌었다. 그런 점에서 홍어는 어른들의 음식이었다.

김수영 문학상을 받은 문혜진의 시집 『검은 표범 여인』(민음사)에는 그런 무모한 욕망으로 가득 찬 동물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중에는 ‘홍어’라는 시도 있었다. 이 시는 홍어가 왜 어른들의 음식인지 잘 보여준다.

“오랜 세월 미식가들은 탐닉해 왔다/ 홍어의 삭은 살점에서 피어나는 오묘한 냄새/ 온 우주를 빨아들일 듯한/ 여인의 둔덕에/ 코를 박고 취하고 싶은 날/ 홍어를 찾는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삶을 향한 욕망일 텐데, 그럼에도 시인에 따르면 그건 “극렬한 쾌락의 절정/ 여체의 정점에 드리운 죽음의 냄새”다. 이 이율배반적인 일, 즉 취하기 위해서 죽음의 냄새를 맡는 일이야말로 홍어를 먹는 자들의 심리를 잘 말해주는 게 아닌가 싶다.

왜 이런 이율배반적인 욕망에 빠지는가를 이해하려면 서경식의 『소년의 눈물』(돌베개)에 나온 다키구치 마사코의 ‘남자에 대하여’란 시를 읽으면 좋겠다. “남자들은 알고 있다/ 늘씬하게 쭉 뻗은 여자의/ 두 다리 사이에/ 한 송이 꽃이/ 봄/ 여름/ 가을/ 겨울/ 저마다 다르게 핀다는 것을.” 제목이 ‘여자에 대하여’가 아니라는 점에 주의해야만 한다. 어쩌면 남자라는 건 죽는 순간까지 그게 꽃이라고 생각하고 죽어야만 하는, 불쌍한 동물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 가을날 오후, 맛있다는 듯이 홍어를 먹던 그 선배들은 모두 남자였다는 얘기인가?

하지만 『여자』(문예출판사)라는 책을 쓴 생물학자 나탈리 엔지어의 이야기는 단호하다. 남자들은 자기의 몸에 대해서도 잘 모르면서 여자의 몸을 신비하다고 주장한다는 것. 앞의 두 시는 공히 남자에 대한 시인데, 어쩐지 시 속의 남자는 몸 없이 존재하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신비화된 건 남자의 몸이다.

『여자』를 읽어보면 여자의 몸은 이제 탈신비화됐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럼 남자의 몸 역시 그래야만 하지 않을까? 남자 시인이 자기 몸에 대해 쓴 시도 한번 읽어보고 싶다. 그게 홍어의 비밀을 푸는 최종적인 단계라는 생각이 든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의 소설가 김연수씨가 격주로 책읽기를 통한 성찰의 시간을 마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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