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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 돈은 안 바꿔 주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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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그런데 정작 해외로 나갈 때마다 대부분의 사람은 환전하느라 번거로움을 겪는다. 한국돈을 현지에서 직접 환전할 수 있는 경우가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필리핀의 세큐리티 은행 등 한국 관광객이 몰리는 일부 동남아 국가의 현지 은행에서 한국 원화로 직접 현지 화폐를 바꿀 수 있는 경우가 있긴 하다. 하지만 그 밖의 경우 우리나라 원화는 아직도 외견상 아프리카 가나 정도의 화폐로 취급당하기 일쑤다.

『문명의 충돌』 저자로 유명한 새뮤얼 헌팅턴에 따르면 1960년대 초 한국과 가나의 경제규모는 엇비슷했다. 하지만 반세기가 지난 지금은 최소 50배 이상의 격차가 난다. 우리는 이미 재작년 3000억 달러 수출의 금자탑을 쌓았다. 교역규모 면에서도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이다. 한국 경제는 그만큼 성장했고 나라의 위상도 높아졌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 돈의 위력은 거의 느낄 수 없다. 한국의 위상과 우리 원화의 가치가 그만큼 괴리가 있는 것이다.
 
한국의 위상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일화가 있다. 지난해 5월께 발틱 3국을 여행할 때였다.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의 국립미술관(KUMU)에서 그림 보고, 조각 보며 생각에 잠기다 출출해져 미술관 안의 카페테리아에서 간단한 요기를 하려고 앉았다. 샌드위치와 커피를 주문했다. 커피에 딸려 나온 네모난 설탕봉지를 찢으려다 멈칫했다. 이유는 거기 한글로 선명하게 ‘설탕’이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니 설탕을 담은 봉지 겉면에 앞뒤로 5개씩 모두 10개국 언어로 설탕을 뜻하는 단어가 적혀 있었다. 영어·독일어·프랑스어·에스파니아어·러시아어로 설탕이라 쓴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정작 동양어로는 일본어도 중국어도 없이 유일하게 한국어로 설탕이라고 적혀 있었다. 반갑기도 하고 뜻밖이기도 했다.

사실 발틱 3국의 에스토니아는 한국인의 발길이 아주 드문 곳이다. 한국인 관광객도 거의 없다. 혹시나 해서 인터넷에서 그 설탕을 만든 회사를 검색해 봤다. 설탕 겉봉에 적혀 있던 www.caffemolinari.com을 검색창에 넣고 엔터 키를 눌러보니 1804년 이탈리아에서 세워졌고 현재는 세계 46개국에 진출한 이탈리아의 브랜드 커피 판매회사였다. 결국 그 설탕봉지 겉면에 선명한 한글은 한국의 위상이 결코 간단치 않아졌다는 단적인 증거였던 셈이다. 그래서 그 설탕을 기념품처럼 몇 봉지 더 구해가지고 귀국했던 기억이 있다.
 
대한민국은 참 대단한 나라다. 안에서보다 바깥에 나가 볼 때 더 많이 느낀다. 하지만 우리의 국가 위상과 걸맞지 않은 것도 여전히 많다. 한국 원화의 초라한 위상도 그중 하나다. 정부도 몇 해 전부터 우리의 경제교역 규모와 급증한 한국 관광객의 편의를 위해 우리나라 원화의 환전 가능 국가를 확대한다는 방침은 세웠다. 하지만 별반 진척이 없는 것 같다.
 
새로 들어서는 이명박 정부가 우리의 국가 위상에 걸맞게 한국 돈의 위상과 위력을 높여주길 바란다. 그러려면 먼저 세계 어느 지역에서든 통용 가능한 국제적 결제통화가 되도록 원화의 환전 가능 국가를 더 확대하는 일에 좀 더 신경써야 한다. 그것이 자국민의 프라이드를 높일 뿐만 아니라 이중 환전이 없어져 자국민에게도 실질적인 이익이기 때문이다.

정진홍 논설위원